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

[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1]용인 사주당 이씨와 '태교신기'

조선 후기 유교적 가치관 뛰어넘어

주체적이고 평등한 시선담은 '모정'
태교숲
용인시는 태교 및 인성함양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태교 숲 힐링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용인시 제공

네자녀 낳아 키운 경험 토대 62세때 집필 '세계 최초 태교 전문서' 과학·현대성 주목
목천 현감 아내로 25살에 용인으로 시집… 18세기 후반 사회변화 읽어낸 지식인 평가
용인시 '인성·배려·존중의 태교도시' 비전… 힐링 숲·축제 등 진행 건강한 시민 육성


胎敎爲本 師敎爲末 태교가 기본(本)이고 스승의 가르침은 끝(末)이다.
父生之 母育之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며,
師敎之一也. 스승의 가르침은 모두 한 가지다.
善醫者 治於未病 의술을 잘하는 자는 병들지 아니하였을 때 다스리고,
善斅者 斅於未生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에 가르친다.
故 師敎十年 그런 까닭에 스승의 십 년 가르치심이
未若母十月之育 어머니 열 달 기르심만 못하고
母育十月 어머니 열 달 기르심은
未若父一日之生 아버지 하루 낳아주심만 못하다.

포스터
태교신기(胎敎新記)에 나온 말이다. 태교신기는 1800년에 쓰여진 태교전문서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사주당(師朱堂) 이씨(1739~1821)로, 여성이다. 태교에 관한 내용이니 여성이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여성이 책을 쓰는 일은 흔치 않았다.



사주당 이씨는 목천 현감 유한규의 아내로 25살의 나이에 청주에서 용인으로 시집왔다. 네 자녀를 낳아 키운 경험과 학문으로 쌓은 지식 등을 토대로 62세에 태교신기를 집필했다. 1801년 사주당의 아들 유희가 언해한 수고본이 성균관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교신기는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태교의 이치를, 2장에서는 태교의 효험을 설명했다. 태교의 중요성과 구체적인 방법이 주를 이루고, 남편과 가족이 임산부의 태교를 위해 지켜야 할 것들도 일러두었다. 사주당의 개인사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남편 유한규와 아들 유희 등 주변 인물이 남긴 글에서 그녀의 성정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아들 유희가 쓴 '어머니 가장(家狀)'과 신작이 쓴 '사주당 묘지명'에 따르면, 사주당은 남편 없이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용인으로 들어가 변변한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구고 촛불도 없이 길쌈을 하는 고통스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먹이느라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딸들에게는 아궁이 불 때는 일을 시키지 않았고, 아들에게는 식량을 싸서 스승을 찾아 멀리 보내기까지 했다. 딸들은 모두 글공부를 해 '태교신기'의 발문을 쓸 정도의 문장을 갖추었고, 아들 유희는 훈민정음의 자모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류, 해설한 언문학자로 '언문지'등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남겼다.

사주당 스스로도 학문을 향한 열망이 컸다. 83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편지 한 묶음과 남편 목천공과의 성리문답, 내가 필사한 격몽요결은 입던 옷과 같이 넣어달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20살의 나이차에도 목천공과 사주당 부부는 함께 학문을 토론했고, 남편은 아내를 지지했다.

이사주당 묘역3
숲속마을 태교정원 생명의 터.(왼쪽)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태교신기. /용인시 제공

태교신기에는 사주당의 지식인, 선각자로서의 면모가 함축돼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사주당이 18세기 후반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요구되던 시기에 누구보다 앞서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읽어낸 지식인이라고 평가한다.

여성들이 지닌 지혜나 지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이를 종합해 책을 써냈으며 그 책 안에는 당시에는 찾기 힘든 주체적이고 평등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녀는 누구나 태교를 하면 군자를 낳을 수 있다고 했고, 자녀를 기르는 초급 교육의 주체가 어머니라고 했다. 당시 유교적 가치관으로 여성이 교육에서 배제돼 있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주장이다.

이사주당기념사업회 박숙현 회장은 태교신기의 과학성과 현대성에 주목했다. 박 회장은 "사주당은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의학전문가이자 육아교육학자"라며 "태교신기는 육아 경험과 경서에 기반한 사상, 황재내경·동의보감 등의 한의서, 여성 교양서와 구전태교를 집대성한 세계 최초의 태교전문서"라고 평가했다.

또한 "태교가 한때 전통적인 것, 혹은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태교문화가 단절됐기 때문"이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태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산부인과·뇌과학 등 현대 의학이 제안하는 태교방법과 사주당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성내지 않고, 찬 곳에 앉지 않고, 나쁜 것을 보지 않는 것, 주변 사람이 임산부를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의 지침은 산모의 스트레스가 태아에 미치는 악영향을 방지한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2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태교서지만, 음식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제외하고는 현재에도 유용하다"며 "태교의 본질은 인성과 건강이고 이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최초의 길잡이"리고 말했다.

태교신기
(왼쪽부터) 조선 후기 여성인 사주당 이씨 묘역, 성균관대 도서관에 소장된 태교신기 수고본, 2016 용인문화유적전시관 기획전 포스터. /용인시 제공

용인시는 2010년께부터 태교신기에 주목했다. 태교신기를 용인시가 가진 자원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인성·배려·존중의 태교도시'라는 비전을 세웠다.

용인시가 꿈꾸는 태교도시란 '태교신기의 근본가치인 인성존중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교육을 통해 건강한 시민을 육성하고 이를 위한 기반시설 및 사회적 환경을 구축해 모든 시민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세대 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도시'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2020년까지 태교도시 조성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모았다. 태교 및 인성함양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태교 숲 힐링 체험, 태교축제 등을 진행했다. 문화원형을 통해 도시 정책을 수립한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례로 남기위해서는 더 세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용인시 문화계 관계자는 "태교신기라는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태교도시를 만들려면, 축제나 행사도 좋지만, 문화적·역사적 토대를 다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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