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43]해광사(옛 화엄사)

일제 강점기 또다른 흔적… 일본 불교가 남긴 벽돌건물 한채
{해광사 '명부전' : 1908년 세워진 조동종 사찰내 초기부터 남아있는 건축물}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6-11-10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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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택 해광사2
1908년 8월 29일 조동종의 사찰로 만들어진 해광사 명부전.

6개 종파 포교위해 절 많이 세워… 도시개발 과정 대부분 사라져
개항장은 땅값 비싸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운 답동 일대 자리잡아
한국 사찰과 달리 門 없이 진입… 대웅전 1990년대 철거돼 아쉬움
전쟁 희생자 등 위패도 안치 "일본 사찰 배치 잘보여줘 관리 필요"

인천 고택 해광사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외국인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믿던 종교도 같이 들여왔다. 일각에서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가장 먼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종교였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 때문에 부산이나 원산, 인천 등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한 지역들은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불교, 프랑스에서는 천주교, 미국에서는 감리교, 중국인들은 중국의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들여왔다.

이에 따라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에는 답동성당을 비롯해 내동성당, 내리교회, 중화 기독교 교회 등이 잇따라 세워지게 됐다.

그중에서 가장 활발히 포교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 불교다.

당시 일본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이 당시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연관돼 있다.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유신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도 막부 정권과 오랜 세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을 후원했다.

이에 새로 만들어진 유신 정부는 당연히 불교계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불교 역사상 유례없는 탄압을 받게 됐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일본 불교계는 정치권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한다. 해외 포교를 위해 포교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세를 염탐해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해외 이주와 식민지 개척 정책을 펼치던 유신 정부와 불교계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진종·정토종·일련종·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인천 등 개항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파됐다.

이에 전국에는 이들 6개 종파에 의해 167개의 사찰이 설립되게 됐다. 당시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인천의 사정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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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답동 일대는 일본 사찰이 많다는 이유로 '사정(寺町)'이라고 불렸다. 사진은 현재의 답동 일대 전경.(왼쪽)해광사 대웅전 정면에 위치한 석탑. 사찰 내부의 구조물들은 건축 당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일본은 철도와 도로부설, 토지조사사업 등 수탈을 위해 각종 사업을 벌였고, 인천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주 일본인에게 유리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행정 구역을 개편해 나갔는데 현재의 인천 중구 답동 일대를 '사정(寺町)'이라고 불렀다.

이 일대에는 1899년 '진종'에서 개창한 '동본원사(東本願寺)'를 비롯해 일련종의 '묘각사(妙覺寺)', 정토종의 '인천사', 조동종의 '화엄사' 등의 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능대학교 손장원 교수는 "당시 도심 지역이었던 신포동 등 개항장 일대는 땅값이 비쌌기 때문에 큰 규모의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우면서 비교적 외곽에 위치한 이곳에 밀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사찰 대부분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그중 '화엄사'만이 '해광사'로 이름을 바꾸고 아직도 남아있다.

7일 오전 인천 중구 신흥동 1가에 있는 '해광사'를 찾았다. 이 절은 1908년 8월 29일 조동종의 사찰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건설된 전형적인 사찰 구조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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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사 명부전 내부 전경. 한국전 당시 희생됐던 국군 장병들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왼쪽)해광사 진입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석축이 아직도 남아있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 건축 방식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야 대웅전에 도착할 수 있는 구조로 배치돼 있다. 그러나 당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 사찰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별도의 문(門) 없이 곧바로 마당과 대웅전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부분 사찰은 본당과 고리(승려의 거주 장소로 부엌의 기능을 겸하는 건물)를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다른 별도의 시설은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1915년 8월 16일 제정된 '신사원규칙(조선총독부가 규정한 사찰 건립 기준)' 4조에는 '사원에는 본당과 고리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규정돼 있다.

부산대학교 이미나 교수는 2012년 발표한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침투와 한국 사찰건축의 변화'라는 논문에서 "포교를 위해 기존에 유치돼 오던 일본인 거류지 도심 내에 별원과 포교소를 설립해야 했으므로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짧은 시간에 포교를 확대해 나가야 했고, 본산에서 자본과 기술력 등을 지원받아야 했기에 최소의 시설만을 인가 해 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해광사 대웅전으로 사용됐던 본당은 1990년대 중반 철거돼 없어진 상태다. 건립 초기부터 남아있는 건물은 본당 뒤 편에 위치한 '명부전'이 유일하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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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철거된 해광사 대웅전. 전형적인 일본 사찰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광사 제공

해광사 명부전은 일반적인 사찰과 다르게 벽돌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해광사 주지 스님인 화진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는 고리로 사용하던 건물을 해방 이후 능해 스님이 명부전으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인천 지역 오래된 절인 만큼 이곳에서는 많은 위령제가 열렸다. 1950년 4월 6일 경향신문은 '작년 추석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평해호 사망자 130명에 대한 위령제가 열렸다'고 보도했고, 1953년 12월 1일에는 '6·25 전쟁에서 희생된 조일윤 대위 등 526명이 해광사에 안치됐다'고 밝혔다. 지금도 해광사 명부전 내부에는 한국 전쟁 희생자 등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손장원 교수는 "해광사는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 배치를 보여주는 인천의 유일한 사찰"이라며 "아쉽게도 개별적인 건물의 특색은 없지만, 사찰 건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건물이기 때문에 지자체 차원에서의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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