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45]송현배수지 제수변실

공원으로 꽃단장한 근대수도시설… 물 흐르 듯 한편을 지킨 백년
{ 제수변실 : 1908년 준공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3호 }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16-11-24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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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택기행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인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형 건물이다. 상부는 돔 지붕으로 처리하고 첨탑으로 장식돼 있으며 출입문 좌우에는 장식 몰딩을 설치하고 상부에도 활 모양의 석재 몰딩을 달아 고전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외관에 비해 내부(오른쪽 작은 사진)는 단순하다. 장식은 일체 없으며 지하 밸브와 연결된 쇠막대, 이를 좌우로 돌리기 위한 핸들이 전부다.

우물 적고 수질 나쁜 인천 개항이후 물확보 비상
일본인들이 상수도 건설 본격화 하면서 세워져

수도국산 위치 제수밸브 보호 콘크리트 시설물
돔지붕·첨탑 장식 등 외부와 달리 내부는 '단순'
송현근린공원으로 재탄생 관광 자원화 큰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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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도 시설은 근대 도시가 갖춰야 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이다.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시설인 송현배수지의 1908년 준공은 인천사(史)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었으며 타지역에 비해 수질 또한 나빴다고 한다.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 확보가 최대 숙원으로 떠올랐다. 일제 때 발간된 '인천부사'와 1973년 발간된 '인천시사'에는 개항 이후 인천의 물 사정에 대해 이처럼 언급돼 있다.

"한때 인천 상수도 시설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재정은 여의치 않아 문학산 계곡에 수원지를 마련하고 수도 시설을 하려 했으나, 그 규모가 너무 적다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선박 급수도 초기에는 풍도에서 하였으나 후기에는 북성동에 우물 5개를 파서 그 수요를 전담케 하였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편함은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전국적으로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인천 거주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상수도 건설 계획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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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근대수도시설이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건 송현배수지가 처음이다. 근대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근린공원으로 인천 동구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05년 나카지마(中島銳治·1858~1925) 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 공사에 착수, 1908년 송현배수지 시설이 준공됐다. 이어서 한강 연안 노량진에 있었던 수원지 정수시설이 1910년 10월 준공돼 그해 12월부터 급수가 시작됐다.

수원지는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 지역은 서울 4대문 안과 용산, 인천 등 3개 지역이었다.

당시 인천부청 조사에 따르면, 수도가 공급된 지 2년 후인 1912년 말 인천시민 중 수도 혜택을 받은 가구는 2천143가구로, 전체 가구의 2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여전히 우물에 의존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급수 인구는 7만명에 달했지만, 노량진 수원지의 취수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영등포 지역의 급수를 위한 송수관 연결 공사를 마친 데 이어 1917년 한강 인도교에 400㎜ 굵기의 철관을 가설하는 등의 대책을 통해 인천의 수도 공급률을 8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인구 증가로 인해 노량진 수원지를 확장하고, 1940년에는 부평에 가압 펌프장을 설치해 9천t이던 1일 송수량을 1만6천t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수요 증대에 대한 대비가 늦어지면서 해방 이후 격일제 급수가 실시되는 등 물 공급이 지역 최대 화두로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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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배수지 제수변실 23개의 장대석 계단과 함께 철제 대문도 준공 당시 구조물이다.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을 주두로 장식했다.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 刊)에선 지역 원로의 말을 인용해 '1940년대 후반 격일제로 물을 공급할 무렵 일반 시민은 물론 소규모 공장이나 가내수공업을 하던 이들은 공장 가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일손을 놓기 일쑤였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100년이 넘는 인천의 수도사(史)를 떠올리면서 늦가을에 인천 동구 수도국산의 송현근린공원을 찾았다.

과거 배수지는 언덕 위에 설치됐다. 물을 높은 곳에 두어서 위치 에너지를 이용해 각 가정으로 보냈던 것이다. 송현배수지는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라 불리던 야트막한 산(해발고도 56.8m 지점)에 자리 잡았다.

배수지시설이 들어선 후부터 이 산은 수도국산(水道局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부지면적 3만6천780㎡의 송현배수지는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었다.

송현근린공원 한 편에 자리 잡은 송현배수지 제수변실(制水弁室·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108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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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대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돌계단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계단은 100년이 넘는 세월과 함께 가을 낙엽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에 가기 위해선 준공 당시 구조물로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을 주두로 장식한 철제 대문을 지나 화강석으로 만든 23개의 장대석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공원이 조성된 현재에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주변의 산책로들을 이용해도 된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형 건물이다. 상부는 돔 지붕으로 처리하고 첨탑으로 장식돼 있다. 또한, 출입문 좌우에는 장식 몰딩을 설치하고 상부에도 활 모양의 석재 몰딩을 달아 고전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출입구 위쪽 벽면에는'백 번 흐르면 만 번 빛난다'는 뜻의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외관에 비해 내부는 매우 단순하다. 내부 벽과 천장에는 장식이 없고, 마룻널을 깔아 마감한 바닥에는 지하 밸브와 연결된 쇠막대, 이를 좌우로 돌리기 위한 핸들이 전부다.

제수변실 내부에 대단한 것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기대감은 산산이 무너졌다.

제수변실에서 나와 시선을 주변으로 옮기니 공원을 산책하는 인파가 시선에 들어온다. 평일 낮이었지만, 인근 주민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공원을 거닐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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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근린공원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공중에 부양한 형태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작은 개울로 흘러 내려가서 다시 순환하는 구조다. 여름에는 어린이들의 물놀이터로 변신한다.

근대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근대수도시설을 공원이나 기념관으로 조성하는 사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근대수도시설이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건 송현배수지가 처음이었다"면서 "근대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현대생활로 끌어들이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인천은 다른 지역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글 = 김영준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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