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어명(御命) 없는 평등의 세상을 향하여

윤진현

발행일 2016-11-28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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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 나라에 왕은 없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있을뿐
국가·국민 권력 사유화 꾀했으니
국권 강탈하는 내란기도인 것
'어명'으로 절대 복종 요구하고
이를 매개한 자들도 용서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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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청와대의 전 비서실장은 청와대 내의 이상 현상, 예를 들면 이상한 지시사항, 결정 루트의 모호함, 잦은 명령 변경 등 문제점을 지적하는 참모, 직원들에게 "어명이다."라고 무조건 복종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나라가 전제 왕권국가였던가? '어명'이란 단어가 21세기 한국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다.

새삼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필자부터도 '수첩공주'를 거쳐 '여왕폐하'라는 단어를 꽤 자주 사용해왔으니 '어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새삼 놀라는 척, 호들갑을 떨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풍자의 의미였지 곧이곧대로 공주고 여왕이라고 생각하란 뜻은 아니었다. 그렇게 사용될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해보면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력을 전제적 권력처럼 마구 휘두른 것을 바른 표현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다. 더구나 옛 왕조시절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자로 지칭한 것은 더 잘못한 것이었다. 오늘 날, 공주나 여왕이란 단어는 미와 고귀함을 내포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풍자라기에는 미화가 과도하다. 그러니 갖은 부정으로 금메달을 따고 대학에 들어가 "돈도 실력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자가 "공주라는 데 좋죠."라는 당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부적절하기로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라는 혼군(昏君)도, 포악하고 막된 임금이라는 폭군(暴君)도 마찬가지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조선왕조가 일제에 국권을 내주고 한낱 일왕의 봉작으로 내려앉은 것이 벌써 100년도 더 된 일이요, 이후로 이 나라에 '왕'이 제대로 고민된 적은 없었다. 속담으로 견주자면 '초가삼간이 다 탔어도 빈대 타죽은 것만은 속 시원하다'는 격으로 일제 침탈로 백가지가 비극인 중에 한 가지 다행을 조선왕조가 종료된 것으로 꼽는 시선마저 일면 타당한 데가 있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신분제'의 온존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혈통', '특별한 신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평등'이란 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장벽이 된다.

그런데 어쩌다 이 나라에는 왕인 줄 착각하는 대통령들이 이렇게 여럿 등장하게 되었던가? 뻔한 소리 같지만 그 기원은 일제 말 황국신민화에 있다. 일제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전쟁수행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식민지 조선의 협력과 동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식민본국이 식민지를 대등한 국가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다. 당연히 교활한 혹세무민의 정책이었다. 초등교육기관을 '황국신민의 학교'라 하여 '국민학교'로 개칭했고 총알받이로, 위안부로 꽃다운 이 땅의 청년들을 끌어냈다. 이들의 희생이 '천황'을 위한 고귀한 것이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전했다.

전쟁은 끝나고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지만 절대화된 권력에 희생을 요구하는 전략은 오롯이 계승되었다. 1대 대통령은 자신이 전주이씨, 왕의 후손이라 광고했다. 쿠데타로 권좌를 차지한 3대 대통령은 황국군대의 장교로서 천황의 권력을 대리하던 경험을 대한민국 국정 전반에 심어놓았고 부당한 개헌과 수많은 희생으로 무려 18년을 집권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왕이었다. 그리고 이를 왕통으로 소환한 결과, 이 나라는 2016년 전제왕국에서도 감히 있을 수 없던 전무후무한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사리사욕의 전방위적 침탈을 겪고 말았다.

이 나라에 왕은 없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며 하늘이 선택하여 절대권력을 부여한 것은 더욱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의 사유화를 꾀했으니 그 자체로 국권을 강탈하는 내란기도인 것이다. 아울러 감히 '어명'이라는 단어로 한 개인의 사악한 뜻을 절대화하고 복종을 요구하다니 그 진원지는 물론이요, 이를 매개한 자들도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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