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유산을 찾아서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4]맹사성의 묘

청백리, 잠들어서도 권력가들을 지켜보다
맹사성 무덤의 호석(좌), 묘표(중), 문인석(우)
조선전기 묘제를 보여주는 맹사성 무덤의 호석(왼쪽), 묘표(가운데), 문인석(오른쪽). /경기문화재단 제공

강남·분당과 가까운 광주에 위치
고위관료에 엄격 청렴한 성품 탓
벼슬자리 절반이상이 좌천·유배
무덤도 소박 고관대작 석물 없어


이 어수선한 시국과 일그러진 권력자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그의 생애와 치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글 즉 졸기(卒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맹사성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방으로 모시고 윗자리에 앉혔다.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배웅하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그였지만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고위관료에게는 엄격했다.



그는 조선의 군왕 중에서 가장 무자비했던 태종 치하에서 26년 4개월간 벼슬자리를 하였는데, 그 절반인 13년 2개월 동안 좌천·파직·유배를 당하였다. 태종의 처남인 민공생을 공격하다가 공주목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후, 세종이 한번 보자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무고로 처리되자 그 잘못을 끝까지 지적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성석린·하륜 등 태종 측근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100대의 곤장을 맞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청백리였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청빈을 잘 대변해 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안 곳곳에 물이 새서 의관이 모두 젖게 되었다.

병조판서가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물건들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고향에 내려갈 때에는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했으며,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녔다.

한편, 성품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었고, 음악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또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의 생전에는 온양까지 찾아가 자주 문안을 드리고,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죽만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자였다.

그의 무덤은 '맹사성선생 묘'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호를 딴 고불산(古佛山)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번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에 위치한다. 봉분은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장방형(長方形)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선전기 봉분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봉분 앞에는 화관석(花冠石) 묘표(墓表)가 세워져 있으며, 묘역 앞의 좌우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앞의 호석, 묘비, 문인석만이 원래의 석물이고, 묘역 내의 옥개형 비석, 상석과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등은 1959년 이후 후손들이 새롭게 설치한 것들이다.

한편 묘소 우측 500m쯤에는 흑기총(黑麒塚)이 있는데, 이것은 맹사성이 즐겨 탔던 검은 소의 무덤으로 그가 죽자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화재적 측면에서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 연잎을 양식화한 묘표의 형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가늘고 좁으며 망부석과 비슷한 눈을 가진 문인석 등은 15세기 전반의 석물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어쨌든 맹사성 묘는 청렴하게 살았던 그의 일생과 소박한 인품을 반영하듯, 고관대작의 무덤에 일반적으로 있는 신도비·장명등 등과 같이 재력이 요구되는 석물이 없다.

그의 무덤은 우리나라 권력의 핵심들이 살고 있는 서울의 강남, 성남의 분당 등에서 가깝다. 스스로 공복이라 공언하는 그들이 맹사성의 무덤을 참배하고, 그의 삶을 반추하면서 '공직자의 자세와 책무'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무덤 주변은 한적하여 호젓함을 즐기기에도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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