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진 칼럼]희망을 희망합니다

홍창진

발행일 2017-01-03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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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피땀어린 광장의 촛불로
새로운 정부 세워놓으면
정치는 또 옛 악습을 되풀이한다
재화만을 탐하는 욕심쟁이들은
오늘도 불의를 공모 하겠지만
희망을 둔 사람 꿈은 깨지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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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지점은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분업화된 사회구조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큰 자본의 유동으로 생겨난 대량 생산체제는 소비패턴을 바꾸었고 분업화를 촉진시켰다. 생산을 하는 사람, 유통을 하는 사람, 그것이 잘 되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연구직, 금융직, 서비스직, 교육직 등등 각각의 역할을 맡아서 자기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만 되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살고 있다.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되고 만일 자기분야에서 인정 못 받으면 낙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낙하산이 인정받고 기회의 균등이 깨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학생 때 열심히 노력하면 취직은 될 줄 알았는데 취직도 힘들고 취직을 해서도 보람보다는 눈치를 보며 윗선을 늘 신경 써야 하며 불의한 경우를 직면해도 나 하나 살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상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현대는 물질로는 더 할 나위 없이 그 전보다 풍요로운데 우리 삶은 점점 더 자유가 없고 일의 양만 폭주한다. 현대는 무엇인가 큰 손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고 우리는 그 연출이 정해 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알다시피 그 연출은 거대 자본이다. 자본을 개인이 독식하고 움직이면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우리 몫의 권력을 정치에 저금해 두었으므로 선거를 통해서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본이 우리를 위해 잘 움직이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이 정치가 개인 자본가와 손을 잡고 우리를 위해 힘을 쓰지 않고 자기들만을 위해 힘을 쓰는 범법을 저지르는 순간 우리는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오래전부터 정·경유착이 이루어져 왔겠지만 최근 대한민국 현실은 그 유착이 극에 달해서 국민들의 체감온도가 바로 느껴질 만큼의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 몫의 권력의 일부를 맡겨 놓았던 정치인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를 이용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대의정치의 룰을 잠시 내려놓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많은 부분이 촛불의 심판으로 바로 잡아 질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촛불은 약 10년 주기로 계속 반복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광장의 노력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워 놓으면 정치는 또 옛 악습을 되풀이 한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희망이라는 것이 고작 10년 짜리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희망이라는 것은 이제 가치가 없는 것일까?

2000년 전 예수 시대에도 정·경유착이 있었다. 식민지시대에 로마총독에게 빌붙어먹던 사람들은 호가호식했고 또 그 자손들이 호가호식한 일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예수시대 말고 다른 여러 문명의 역사를 보아도 불의한 욕심꾸러기들은 호가호식하고, 착하게 열심히 일하는 자본 없는 사람들은 착취당하고 노예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수라는 사람의 존재방식이다. 욕심꾸러기를 대하는 방법이 남다르다. 보통은 정의로운 여러 사람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한 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수는 그들을 그냥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쳤다. 즉, 세상에서 돈이라는 한 가지 가치만을 논하면 정의는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삶을 돈의 가치로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가치로 보면 용서를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세상을 물질로만 이해하면 네 것 아니면 내 것인데 내 것을 네가 조금만 더 가져가도 불의한 것이다. 그러면 정의의 사도로서 싸우든, 악당의 입장에서서 싸우든,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현실은 인간이라면 모두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욕심이 있는 한 우리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세상에서 평생 싸움만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세상의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하늘나라에서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3형제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수술비 3천만원 때문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각각 1천만원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그러나 각자 우는 소리를 내며 어려운 사정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가장 형편이 어려운 막내의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수술비 결제를 끝냈다. 3형제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고맙다는 말보다 건방지다는 뒷담화만 무수히 남겼다. 막내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런 일 해야 인정받아요. 저는 살아보니까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면 누구의 뜻대로 인생이 결정될까요? 하늘의 뜻대로 되더라구요."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들은 더 현실적이고 혁명적이며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잘못된 종교의 신봉자처럼 주술적으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 우정, 평화, 나눔 등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재화만을 가지려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모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따라갑니다.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는다면 희망이 보입니다. 세상은 10년 주기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쟁이들은 오늘도 불의를 공모하겠지요. 그러나 하늘나라에 희망을 둔 사람들은 희망이 꺼지지 않습니다.

/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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