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8]황해도 벽성군 출신 김완수 할아버지 (下)

아버지가 나막신 만들던 풍경

노랫가락에 배어나는 '그리움'
나막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나막신 만드는 장면. 1882~1897년 한국의 세관 관리 등으로 재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 소장.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

벽성군 해방이후 '두동강' 동강면은 남쪽 편입 후 1·4후퇴때 北으로
삼면이 바다 '해산물' 풍부… 서울 마포까지 가서 '바지락젓' 팔기도
해방직전 먼저 떠난 부친은 목수 "이웃들이 '나막신 장사네'로 불러"
日 '게다' 모양도 있었지만 조선 중기 들어 발 감싸는 굽 달린 형태로
화재로 사진 등 다 타 '노래'로만 추억… 민요 '서도소리' 정확히 기억
작년 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서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인기상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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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할아버지의 고향 황해도 벽성군은 1945년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리되면서 두 동강이 났다. 할아버지가 살던 동강면(洞江面)은 남쪽으로 편입돼 경기도 옹진군 소속이 됐다가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북한 치하에 들어갔다가 그해 9월 수복됐으나 이듬해 1·4후퇴 때 다시 북한 땅으로 넘어간 뒤 여전히 미수복 지역으로 남아있다.

동강면은 휴전 이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강령군 동강리가 됐다. 동강면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없는 해산물이 없었다. 주민들은 바다에 나가 조기나 우럭 등을 많이 잡았고,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굴을 캤다.



특히, 동강면 바지락젓은 서울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먹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상인들은 한강 하구를 따라 서울 마포까지 가서 바지락젓을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황해남도 청단군 소속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벽성군이었던 용매도(龍媒島)의 새우젓과 밴댕이젓도 유명했다.

어머니가 해주는 고슬고슬한 가마솥 밥에 젓갈 하나 딱 얹어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지금도 새우젓 한 가지로 소주 한 병을 거뜬히 해치운다. 짜지 않고 시원하게 담근 아삭한 북한식 김치는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의 맛으로만 남아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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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한 삶 상징 '나막신' 신은 추사 김정희 모습…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허유(許維)가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 유배 생활의 처연함을 보여준다. 출처/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소장
1937년생인 김완수 할아버지는 태어나기 1년 전인 1936년 개교한 동강공립국민학교를 다녔다. 1995년에 나온 '옹진군민회지'에 따르면 동강면에는 중고등학교가 없어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멀리 해주로 가야 했는데, 1947년 동강국민학교 부설 고등공민학교가 생기면서 할아버지는 동강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부설 고등공민학교를 '보습소'라고 기억했다. 새끼줄과 헝겊을 엮어 만든 축구공으로 동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는 게 유일한 놀거리였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아버지는 1945년 6월 해방을 불과 2달여 앞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와 관련한 추억은 많지 않지만, 아버지가 동네에서 알아주는 목수였다는 것은 기억한다.

"아버지는 집도 짓고, 책상도 만들었는데 특히 나막신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어서 이웃 어른들은 우리 집을 '나막신 장사네'라고 불렀어."

비가 오거나 날이 궂을 때 신는 나막신은 1910년대 폐타이어 등을 재생해서 만든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말에 재등장했다. 1938년 4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전쟁물자 조달로 인한 원료난으로 인천의 고무공장이 휴업을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때문에 황해도와 충청도 등지로 보내지던 고무신 공급이 중단됐고, 사라졌던 나막신이 재등장했다. 여름에는 짚신을 신으면 됐지만, 겨울나기 신으로는 나막신이 필수였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나막신 특수'를 누렸다. 아버지의 나막신은 '배(船)' 모양이었다.

버선처럼 앞 코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습으로 바닥에는 굽이 앞 뒤로 2개 있는 방식이었다. 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일평생 만든 나막신은 누가 언제부터 신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 서민들이 주로 신던 전통 신은 풀로 만든 짚신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의 고려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은 당시 고려 사람들이 신던 짚신을 소개하면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모양이 기이하나 전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신는다"고 전할 뿐 나막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막신은 출토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와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추측만 가능하다.

조선 중기 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집인 '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는 남자 아이가 성인식 때 신는 그림이 그려진 나막신 '채극'을 소개하면서 중국 진(晉)나라 왕 문공(文公·BC 697~ 628) 때 나막신이 처음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목극변증설'편에서도 진 문공이 언급된다. 진 문공은 왕 위에 오른 뒤 자신의 망명 생활을 돕던 개자추(介子推)를 등용하지 않았는데, 개자추는 이에 실망해 산으로 숨었다.

뒤늦게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를 산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나무를 껴안고 죽었다. 문공은 그 나무를 깎아 신발을 만들어 발아래(足下) 두고 그리워할 때마다 머리 숙여 신을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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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에는 지금 일본 나막신 '게다(げだ)'처럼 평평한 신에 발가락을 끼우는 끈을 달아 만든 모양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들어 이런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김완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만든 것처럼 발을 감싸는 방식에 굽이 달린 모양으로 변화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주도 유배 시절 모습이 그려진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에서 김정희가 신고 있는 나막신이 딱 그 모양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나막신 만드는 풍경으로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작업하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나막신의 변천사는 학계에서도 관심이어서 시대별 나막신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과 각종 연구 논문들이 여럿 나올 정도다.

나막신은 청빈한 삶을 상징하기도 했다. 옛 남산골 선비들은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걸었다고 해 '딸깍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막신은 양쪽 모두 같은 크기로 발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만들어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겨우내 방 한 칸을 작업실로 삼아 1주일에 10켤레 정도의 나막신을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과 기공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손기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가 고향만큼이나 그립다.

할아버지가 고향에서 가지고 내려온 국민학교 졸업장과 가족 사진이며 족보 등은 영흥도에서 염전을 할 때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모두 타버렸다. 피란살이 든든한 버팀이 됐던 솥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물상이 그만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는 바로 '노래'다. 어린 시절 고향 어르신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불렀던 민요 가락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즐겨 부른다는 '해주아리랑', '자진난봉가', '양산도', '개성난봉가' 등을 서도소리라고 한다. 서도소리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불리는 민요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996년 한국서도소리보존회 회원 한기섭 씨가 펴낸 '전통서도소리전집'은 서도소리를 '애환에 찬 한 맺힌 푸념조의 애절한 가락이면서도 기질과 조화된 꿋꿋하고 씩씩한 기상이 우러나오는 음조(音調)'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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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1일 녹화한 KBS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에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완수 할아버지가 진행자 송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옹진군 제공

취재 중 김완수 할아버지가 즐겨 부른다는 몽금포타령을 한 곡조 뽑았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지난 2월 28일 서도소리보존회 인천시지회 정은희 회장을 만나 미리 녹음한 김완수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려줬다.

정 회장은 "가사도 정확하고 특히 음정과 박자도 흔들림이 없어 정식으로 배운 티가 난다"며 "서도민요는 뱃일을 하러 간 신랑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많아 애절함이 특징인데, 맛을 잘 살리신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푼다. 2016년 6월 11일 녹화해 7월 10일 방영한 KBS 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에 출연한 김완수 할아버지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 인기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인기상 메달이 할아버지의 방에 애지중지 모셔져 있다.

살아생전 한 번 고향 땅을 밟아나 봤으면 좋으련만. 두고 온 사람, 두고 온 집이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으련만. 김완수 할아버지는 지금도 통일이 될 그 날을 고대한다.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옛날 사람들 살았는지 만나보고 싶어. 늙은이는 죽었을끼고, 우리 또래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통일 좀 됐으면 하는 게 한이지 뭐. 원은 그것밖에 없어. 통일돼서 평양사람이 대전도 가고 부산도 가고, 부산사람이 평양도 가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좋겠어. 통일되면 중국도 열차 타고 가면 되는데 남북 분단이 웬수지…."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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