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탄핵 절차는 민주주의와 친화적인가

최창렬

발행일 2017-03-01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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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상호 보완적'
그러나 탄핵에선 '대립적관계' 될 수도
가장 본질적 정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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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지난 해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것도 재적 3분의 2가 넘는 234표라는 압도적 표로 통과되었다. 이후 석 달이 다 가도록 이념적 갈등은 물론이고 국정의 비정상적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여러 의미 중에서 국민주권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이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의회가 국민을 대표해서 통과시킨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전적으로 최종 결정이 위임되는 지금의 제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주권자의 의사가 왜곡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이는 탄핵안의 인용 여부와 무관하게 대의제의 의미와 관련해서 헌정주의가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지점일 수도 있다. 국회에서 입법된 법률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리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헌재 심판에 승복하는 것은 규범과 당위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대통령 측은 헌재 재판의 절차와 정당성을 훼손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헌재 재판정에서의 망언과 극언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법치를 부인하는 언사를 예사로 쏟아놓는다. 헌재의 판결에 재심이란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대리인단이 결국 헌재의 심판을 지연하고, 최종 결론이 인용으로 날 때 이에 불복하기 위해 8인 체제는 '재심 사유'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탄핵 기간이 길어질수록 갈등의 절충과 타협을 통한 사회적 합의의 도출은커녕, 대립 지향적 구도의 형성으로 사회적 통합은 요원해 진다. 또한 국정농단의 당사자들에 대한 단죄의 동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헌법 체계를 부정하는 물리적 폭력이 수반한 혁명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최소정의적 관점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이다.

탄핵심판 선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도 결과에 대해 승복해야 한다. 헌재의 심판이 끝나고 대선 정국이나 혹은 대선 이후의 개헌 논의 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지금의 대통령 탄핵절차이다. 주권자인 국민을 대리하는 대의기구인 국회가 결정한 사안을 헌재의 재판관이 최종 추인해야 하는 제도는 엄밀하게 말하면 국민주권주의의 위반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헌재가 거르도록 한 취지는 대통령 탄핵이 정치공학적으로 다수의 횡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폐해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가 그랬다. 그러나 박 대통령 탄핵 과정은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 이후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될 수 있고, 민의와는 배치되는 정치적 퇴행이 초래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역사적으로 조응해왔다. 또한 헌법에 의한 정치인 헌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는 상호대립적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헌법에 의한 정치인 법치가 민주주의의 보완재로 기능하지 않고 대체재로 작동하는 구도는 민주주의의 훼손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 여러 정의가 존재하지만 역시 가장 본질적 정의는 '다수의 인민에 의한 지배'다.

설령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에 따른 중우정치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어도 주권자의 다수 의지를 훼손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부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태극기로 포장하고 위장하고 있는 탄핵 반대 세력은 그들이 탄핵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고 있기에 반민주적이다. 갈등의 확대재생산은 국회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지 않는 제도적 결함 탓도 있다. 주권자가 선택한 대리인의 권한을 회수하는 데 심대한 기회비용을 치러야 하는 제도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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