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우리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윤상철

발행일 2017-03-14 제12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댓글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지금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과
이해관계 지닌 사회관계란 점을
시인하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복잡하게 이합집산하는 집단들
정당·세대·지역이든 서로 같음을
강요않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2017031301000943900045721
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다른 백년'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있다. 대선후보들은 "역사교체"와 "시대교체"를 주장한다. 어떤 시대를 환골탈태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같이 하자는 데 누가 탓할 것이며, 모름지기 지식인이건 정치인이건 국민과 더불어 앞장설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에 나타난 일은 아니다. 민주화 30년 동안 우리는 매번 새로운 정부를 만나야 했다. 개혁적 정부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자칭했고, 보수정부도 이전 정권과의 단절을 강조했었다. 그 어떤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에게 이어받을 유산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적 민주정부라 하기에는 더없이 치욕적인 이유로 탄핵사태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 헌재재판관의 보충의견이 30년 전에 나왔어야 할 말처럼 낯설기만 하다. "이 탄핵심판은… 미래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헌법적 가치와 질서의 규범적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잠시 사회학자 짐멜의 사회관계론으로 돌아가자. 그는 사회관계를 다이애드(이자관계, Dyad)와 트라이애드(삼자관계, Triad)로 나누어 설명한다. 트라이애드는 한 명의 구성원이 다이애드에 추가된 데 불과하지만 그 사회관계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개인의 목소리와 개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사회적 갈등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다이애드와 달리 집단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고 집단의 정체성이 강화되는 반면, 트라이애드의 개인들은 덜 자유롭고, 덜 독립적이고, 더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 보자.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양당제가 바람직한 정당체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경상도당과 전라도당, 부자의 당과 노동자·서민의 당으로 늘 나뉘어져왔다. 전형적인 다이애드 관계가 정치세력이나 정치적 이념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제3의 세력은 늘 '사꾸라' 혹은 '이중대'로 매도되거나 외면당했다. 깊게 들여다보면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었다. 'x사모' 혹은 'x빠'의 이름으로 나(I)와 동일한 우리(we)를 가두어 놓고 나 아닌 다른 모두를 밀어내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나 밖에 없지만 그런 나를 돋보이기 위해 나 아닌 남을 상대로 치켜세우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만이 존재하였다.

다이애드에 집단의 정체성이 없듯이 '적대적 공존' 안에는 우리가 없고, 민족이 없고, 국가가 없고, 대한민국이 없다. 심지어 모두가 동의하는 우리 역사도 없다. 오로지 갈등하는 다이애드만 있을 뿐 이를 매개하고 조정하는 제3의 무엇이 없다. '탄핵인용'과 '탄핵기각'은 있지만 그 중간은 없었다. 대선후보들이나 국회의장까지 나서서 '탄핵심판'의 결과를 승복하자고 했지만 자신이 희망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정치세력간의 싸움이 존재하더라도 이른바 감사원이나 검찰, 국정원이나 군대 등 이른바 '헌법상 독립기구'들이 뭔가 중립적으로 양자를 조정하거나 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기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 다른 이념들이 충돌하더라도 헌법은 존재하고, 역사적 전통이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디케의 저울'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마저도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분열된 다이애드로 싸울 일은 아니다. 우리를 확인시켜 줄 제3의 구성원을 찾아 트라이애드를 만들 일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사람들은 감성적 직관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나중에 논리적 정당화를 한다고 말한다.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사회는 다양한 직관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스스로의 의견들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조직된 사회라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과 이해관계를 지닌 그런 사회관계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복잡하게 이합집산하는 집단들, 그게 정당이든 세대든 지역이든 뭐든 서로 같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상대화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찾을 수 있고 매번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안에서 그러한 다이애드의 독재가 붕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윤상철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