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경방삼양그룹 - 1 경성직뉴 인수

일본 역직기 수입·옷감생산
한국 근대 방직공장의 효시

경인일보

발행일 2017-03-21 제8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댓글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호남 최대 지주 아들 김성수
경영난 겪는 방직업체 인수
日 제품과 품질 경쟁서 밀려


2017032001001428100069101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방삼양그룹은 올해로 꼭 100년을 맞았다. 창업자 김성수가 1917년에 인수한 경성직뉴를 모체로 1세기만에 굴지의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경방삼양그룹은 이미 일제시대 말기에 재벌에 준하는 규모로 성장, 국내 기업들 중 자산규모가 가장 컸을 뿐 아니라 영위하는 사업내용도 화신그룹과 함께 가장 다채로웠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대기업집단을 형성했던 것이다.

■ 경성직뉴 인수

국내 기업들 중에서 형제들이 공동으로 노력해서 재벌로 성장한 사례들이 종종 확인된다. 형은 창업의 씨앗을, 동생은 이를 키워 대기업집단으로 발전시키는데 대표적인 예가 경성방직과 SK, 진로그룹 등이다. 경방삼양그룹은 형인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창업을, 동생인 김연수(金秊洙, 1896~1979)는 경영인으로서 재벌을 완성했다.

6·25전쟁 와중인 1951년에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취임했던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에서 김경중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차남 김연수는 1896년에 태어났다. 부친 김경중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유학자 김인후의 12대 손으로, 막대한 토지자본을 축적해 호남 최대지주가 됐다.

김성수는 큰아버지 김기중 슬하에 아들이 없었던 탓에 양자로 입적, 김연수가 김경중의 대를 잇게 된다.

김성수는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 1915년에 운영난에 직면한 중앙학교(현 서울 중앙중·고)를 인수했다. 1917년에는 친구인 이강현의 권고로 한국 최초의 민족계 면방기업인 경성직뉴(京城織紐)를 인수, 산업활동과 인연을 맺는다.

이강현은 일본의 동경공고 방직과를 다닌 엘리트 섬유기술자로 동경유학시절에 김성수를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등을 가르쳤는데 경성직뉴가 경영난에 직면했음을 알고 김성수에게 인수를 권했던 것이다. 이후 이강현은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다.

경성직뉴는 방직 관련 수공업자들 중 이정규, 박윤근 등이 1911년에 자본금 10만원(현재가치로 약 16억원)을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한 국내최초의 근대적 방직업체다.

병목정(현 중구 쌍림동)의 공장에 발동기 1대와 직뉴기(織紐機) 67대를 구비하고 면사, 마사, 견사를 원료로 댕기, 분합, 허리띠, 주머니끈, 대님 등을 직조했다. 초대사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 였다.

경성직뉴가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도 설립 이래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서양 생활문화 유입으로 전통 한복문화가 급속히 퇴조했던 때문이다. 김성수가 경성직뉴 인수에 관심을 둔 것은 당시에 연간 2천700만원의 광목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돼, 이를 국내산으로 대체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경성직뉴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는 댕기, 염낭끈 등의 생산을 중지하는 대신 일본 풍전직기(豊田織機, 토요타자동차의 전신)로부터 역직기 40대를 수입해 옷감을 생산하는 방직공장으로 전환했다. "한국인의 옷은 한국인의 손으로 짜서 입자"는 마케팅전략도 확정했다.

혼합사직인 '와사단'과 추동복용 '한양목', 모시 대용품인 '한양사' 등을 생산해서 '삼성(三星)'이란 상표를 붙였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일본의 고품질 광목과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근대방직공장의 효시가 됐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