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그야말로 고릿적 화재

정진오

발행일 2017-03-20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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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 불, 800여년전 '강화 화재' 닮아
당국, 고려 정부때처럼 배운게 전혀 없어
최첨단시대 더이상 화재없도록 대책 시급


정진오 사진(새 데칼용)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지난 주말 새벽 소래포구에 불이 나 300개 넘는 좌판 점포 중 3분의 2가 잿더미로 변했다. 평소 소래포구의 주말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인천 시민만이 아니라 인근 경기도나 서울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눈앞에서 배가 드나드는 광경이 펼쳐지는 포구에서의 신선한 횟감은 보는 것만으로도 회가 동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울 사람에게 소래포구는 남다르다. 소래포구의 큰불은 2010년 이후에만 벌써 3번째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어떻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유형의 화재가 몇 년마다 반복될 수가 있는가. 그 사이 관계 당국은 뭘 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민다.

소래포구 화재 사건으로 열을 받자니 800여 년 전 강화도에서의 잇단 대화재가 떠올랐다. '고려사절요'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 10여 년 사이에 3번의 큰 화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234년) 봄 정월에 큰바람이 불고,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 '(1236년) 3월에 시가(市街)의 남쪽 동리 수백 가(家)에 불이 났다' '(1245년) 봄 3월에 강도 견자산 북쪽 마을 민가 800여 호에 불이 나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연경궁까지 연소되었다' 이렇게 잇따라 큰불로 엄청난 피해를 본 고려 정부는 연경궁 소실 1개월 뒤에 가서야 대책을 내놓는다. 관청 건물에 맞닿아 있는 민가를 50척 거리까지 헐어서 공간을 확보해 불이 나더라도 관청까지는 번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어찌 되든지 관청만 안전하면 된다는 그런 식이었다. 이건 대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800여 년 전 강화의 화재와 지금 소래포구의 불은 여러모로 닮았다. 한적할 듯싶은 강화도에서 한 번 불이 나면 수천, 수백 호의 집이 불에 탔다. 그 피해 또한 막대했다. 화재 피해가 컸던 것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있던 사람 대다수가 엉겁결에 강화도로 이주하면서 민가가 다닥다닥 붙어 지어졌기 때문이다. 몽골 침입 당시 개성에는 10만 호에 달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30만에서 50만 명 정도는 살았다는 얘기다. 그들이 대부분 이주한 당시 강화는 개성 실향민의 신도시였다. 소래포구 또한 실향민들이 일군 관광지나 마찬가지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소래포구 일대에는 주민 수가 10여 명에 불과했다. 포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6·25 전쟁 와중에 황해도 등지에서 피란 나온 실향민들이 강화나 인천 동구, 중구 등지의 원주민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척박한 곳을 찾은 게 바로 소래포구 터였다. 소래포구는 그렇게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다.

이번 세 번째 소래포구 화재는 최첨단 시대를 사는 관계 당국이 800년 전 고려 정부처럼 그동안 두 번의 화재에서 전혀 배운 게 없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우리 국민은 안전과 관련해서는 당국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스타일이다. 여름철 태풍 예보 기관에서 센 바람에 창문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면서 테이프를 붙이면 안심할 수 있다고 하면 곧장 문구점이며 마트로 달려가 창문이란 창문은 빼놓지 않고 엑스 표시를 할 정도다. 이런 국민들에게 그동안 당국이 내놓은 것은 고려 때나 있을 법한 말 그대로 고릿적 대책이었다. 지금이 고려시대가 아니라면, 당국은 이제 더 이상 불이 나지 않을 그런 대책을 내놓길 바란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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