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슬픔의 조사(弔辭)

고영직

발행일 2017-03-27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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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운명적으로 망각에 서툰 사람들이 있다. 한국문학 현장에서 소설가 임철우가 그런 사람이다. 임철우는 1981년 문단 데뷔 이후 지금까지 '가만히 있으라'며 망각을 재촉하고 강요하는 시대의 감정구조에 맞서 기억과 죽음에 관한 사유를 행간에 부려놓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80년 오월 광주의 상흔을 기록한 대하소설 '봄날'이 그랬고, 전쟁과 분단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상처와 그늘을 잊지 않으려 한 '백년여관'이 그러했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통치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넋을 위무하고 희생자들의 얼굴과 마주하려는 고통의 글쓰기를 해온 것이다.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도 기억술사로서의 글쓰기는 여일하다.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죽음 앞의 인간이 된 노인들이다. 그는 혼자 살다 혼자 죽어가는 무연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쏟는다. 오직 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려는 '흔적'의 '당신'과 더불어 쪽방에서 고독사를 맞게 되는 '세상의 모든 저녁'의 '허만석'이 그들이다. '간이역'과 '물 위의 생'의 인물들 또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죽음 앞의 인간이 되어버린 존재들에 대한 침통한 붓질을 통해 '죽음이 죽은' 사회를 성찰하며,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죽은 지 일주일 넘도록 방치된 주검을 묘사하는 '세상의 모든 저녁'은 너무나 참혹하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명명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고립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죽음을 성찰하는 임철우의 글쓰기는 죽임의 권력에 의해 반복되는 '죽임의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에서 비롯한다. 고통은 오로지 기억하는 자의 몫이라는 작가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보도연맹 사건, 베트남전쟁, 1980년 오월 광주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한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표제작 '연대기, 괴물'은 연대기(年代記) 형식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국가의 오·작동 상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수작이다. 전작 '백년여관'의 축소판이되, 더 이상의 '굴욕'을 견디지 않겠다는 작가적 결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이 모욕당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절박감이 감지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죄책감 때문이리라.

시대에 대한 부채감은 임철우 소설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부채감은 '남생이'에서도 어느 소녀의 강렬한 '눈빛'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소녀는 자신이 나병 환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목격한 소년에게 묻고 또 묻는다. "너, 아무한테도 말 안했지?"라고. 소녀의 강렬한 눈빛에서 표제작에 등장하는 세월호 참사 아이들이 살기 위해 선체의 벽을 긁어대던 손톱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난 25일 밤, 세월호가 침몰 1천75일 만에 인양되었다. 그것은 1천75일 간의 슬픔의 결정체이고, 1만t의 한숨과 눈물이다. 잔인했던 그해 사월의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의 죽음들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기억술사 임철우의 소설이 죽은 넋들의 씻김을 위한 진혼의 조사(弔辭)가 될 것이리라. 우리는 아직 상중이고, 탈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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