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4]경방삼양그룹-③삼양사와 중앙상공

일제 산미증식 계획에 주목
고향땅에 대규모 농장 설립

경인일보

발행일 2017-04-04 제9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미곡수출 활발 영농사업 호황
경성직뉴, 사명개명·영업 확대
위기돌파·정착 '기업집단' 변모


2017040301000116000005661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성방직이 잇따른 경영위기를 넘기고 안착할 무렵 김연수는 독자적인 사업에 눈을 돌린다. 고향 일대에 산재한 대단위 농토에 주목해 농장기업의 설립을 도모한 것이다.

한국산 쌀의 일본수출이 본격화한 것은 개항(1876년) 이후부터였는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부터 한국 내에서 식량 증산을 서둘렀다. 식량이 부족했던 일본이 19세기말부터 공업화하면서 식량부족이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일제는 한국 내에서 8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소유권자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공유지·사유지는 물론 황실 및 정부기관의 부동산까지 조선총독부에 귀속시켰다. 총독부가 일거에 국내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총독부로부터 출연 받은 일부 토지를 일본인들에 헐값으로 불하해 한국농촌을 장악했다.

일제는 한국을 그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급속한 일본공업화에 따른 부족한 식량을 한국에서 식량증산을 통해 조달받으려는 전형적인 식민지정책이었다. 일본의 고리대자본들이 한국농촌에 대거 침투해서 대규모 농업경영을 서둘렀다.

농장을 기업형태로 경영하였는데, 주요 종목으로는 미곡 생산과 판매, 창고업, 고리대금업 등이었다. 일본으로 미곡수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영농사업은 호황을 구가했다.

김연수는 1924년 10월 1일에 농사기업인 삼수사(三水社, 삼양사의 전신)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김연수 집안은 전라도 곳곳에 논 900여 정보와 밭 380여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전남의 장성농장(長城農場)을 개설했다. 1926년부터 수확을 개시한 장성농장은 1934년에는 1만석을 추수할 수 있는 약 410정보(122만5천866평)의 대규모 농장으로 성장했다.

1925년에는 줄포농장(158정보)과 줄포정미소를, 1926년에는 신태인농장(연산 5천석), 명고농장(연산 1천500석), 고창농장(270정보)을 개설했다. 고창군 줄포면 우포리와 흥덕면 신덕리에 공사 중이던 간척지를 인수하고 공사비 5만3천여원(현재가치 약 4억여 원)을 들여 방조제를 쌓아 7만5천여 평의 논을 조성했다.

1927년 10월에는 영광군 법성포 근처에 법성농장(논 56정보)을, 1931년에는 영광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122정보의 농토를 묶어 영광농장을 개설하는 등 곡창지대인 호남지방 곳곳에 농장을 증설했다.

한편, 1926년에 경성직뉴에서 개명한 중앙상공은 영업종목에 고무신 생산 외에 무역업과 창고업, 광산업을 추가했다. 경성방직에서 생산한 광목과 삼수사에서 생산한 곡물 판매도 병행했는데 고무신사업이 호황이었다.

삼수사는 1928년에 줄포 간척지공사를 준공하는 등 미곡생산과 농지확장에 주력하다가 1931년에 삼양사(三養社)로 개칭하고 농장경영과 간척사업을 통해 굴지의 농장기업으로 정착해 갔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중앙상공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김연수는 매제 김용완(金容完)을 투입했다. 김용완은 별표 고무신을 들고 시장을 누비며 '6개월 보증판매제'를 실시, 당시 고무신업계를 석권했던 대륙고무를 능가하는 매출을 올린다.

중앙상공은 국산장려운동에 고무된 지방상인들의 적극적인 구매로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의 관계사는 경성직뉴와 삼양사, 동아일보 등으로 불어나 기업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