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골프의 대체역사 VS 정치의 대체역사

임성훈

발행일 2017-04-10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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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연의 '조건없는 양보' 엄청난 나비효과
안철수, 양보없이 시장 나왔다면 어땠을까
후보들 '실재역사'가 대체역사보다 낫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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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훈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배우기도 어렵지만 경기규칙 또한 상당히 어려운 운동이 골프인 것 같다. 얼마 전 끝난 한 LPGA 대회에서의 벌타 논란을 보면서 부쩍 드는 생각이다. 이 대회에서 선두를 달리던 한 선수가 홀컵을 불과 30㎝ 남짓 남겨놓고 공을 마크한 게 논란의 시작이다. 공을 마크한 뒤 다시 놓는 과정에서 실제 위치가 아닌 2.5㎝ 정도 떨어진 곳에 공을 놓고 퍼팅을 한 게 문제가 됐다. 무심코 저지른 실수(아마추어에게는 시비 거리도 안되는)인 듯한데, 어느 시청자의 이메일 제보로 그 선수는 무려 4벌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고 우승은 유소연 선수에게 돌아갔다. '마크한 볼은 원래 그 자리에 놓은 뒤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규칙을 적용한 결과지만 "집에 있는 시청자가 경기위원이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 등이 맞서면서 이 벌타 사례는 지금도 골프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됐다. 이 대목에서 타임머신의 계기판을 조금 과거로 돌려 다른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유소연의 대체역사(代替歷史)다.



2017년 4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미션힐스CC 다이나 쇼어 코스. 승리를 확정 지은 유소연이 대회 전통에 따라 대형 연못 '포피 폰드'에 뛰어들 참이었다. 순간, 유소연이 고개를 숙인 채 쓸쓸히 그린을 떠나는 렉시 톰프슨을 불러 세운다. 이어 갤러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오늘의 승리를 톰프슨에게 양보하려 합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실수로 인해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게 같은 선수로서 안타깝습니다. 저에겐 앞으로도 우승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자와 함께 '포피 폰드'에 뛰어들 일은 평생 없을 것입니다."

유소연은 이어 톰프슨의 손을 이끌고 함께 포피 폰드에 뛰어든다. 흠뻑 젖은 두 골퍼가 서로 포옹을 하는 사이 갤러리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뜻밖의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주최측은 고심 끝에 두 선수에게 '공동우승자'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파장은 이제부터다.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에 퍼졌고, 각 언론은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며 극찬의 기사를 쏟아낸다. 유소연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서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쥔다. 또 광고와 인터뷰, 강연요청이 쇄도하면서 본의 아니게 우승 상금을 훨씬 웃도는 상업적 효과까지 거둔다.

대체역사는 하나 또는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다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은 문학 장르를 말한다. 그러나 보다 많은 분야에서 '대체역사적' 상상은 가능하다. 정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가령,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지지율 50%를 넘던 안철수가 지지율 5%에 불과한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하자 곧바로 대선지지율 1위로 등극하는 '안철수 현상'이 불어닥친 적이 있다. 정치권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아무런 조건 없는 양보'가 유소연의 대체역사처럼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만약 안철수가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면 안철수 현상이 가능했을까?

사실 유소연의 대체역사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당시 큰 이슈가 됐던 안철수 현상을 모티브로 재구성해본 발칙한(?) 상상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유소연 선수가 거둔 우승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니었음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대선이 한달 남았다. 남은 시간, 대선 주자들은 저마다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 정치공학적 분기점을 찾느라 온힘을 쏟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기점에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대체역사들이 탄생할 것이다. 역사책에 기술되는 실재역사가 대체역사보다 낫기를 바랄 뿐이다.

/임성훈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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