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포 최희섭 거르고 김상현 선택
당시 金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과감한 도박이자 고도의 심리전
야구에는 항복이라는 제도가 없다. 하지만 투수가 상대 타자가 전혀 칠 수 없는 멀찍한 곳으로 공 네 개를 던져 1루까지 내보내는 '고의사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대 팀이 한 명의 타자를 상대로 흔들어대는 국지적인 백기라고는 할 만하다.
그런 항복선언을 받아내는 타자로서는 타격 기회를 잃는 것은 아쉽더라도 일단은 아주 불쾌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최소한 2루 이상을 얻어낼 확률이 아주 높은 타자라는 점을 인정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앞 타자를 향해 고의사구가 던져지는 것을 지켜보는 후속 타자에게, 그것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앞에는 타점을 올릴 수 있는 '밥상'이 차려진다. 앞 타자가 내야안타나 상대방의 실책, 혹은 끈질기게 볼을 골라 출루한 경우와 상황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분은 완전히 다르다. 상대는 자신을 향해 '네 앞 타자는 무섭지만 너는 만만해'라고 시비를 걸어온 셈이고 끝내 범타로 물러난다면 눈앞에서 놓친 점수 한두 점을 떠나 상대의 노림수와 도발에 그대로 놀아나고 말았다는 불쾌함과 불길함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2009년 봄, 김상현은 십여 년의 프로생활 동안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유니폼만 두 번 갈아입고 친정팀 기아 타이거즈로 돌아와 있었다. 워낙에 빈약한 타선 탓에 8개 구단 최강의 선발진을 갖추어놓고도 연패와 역전패를 거듭하던 팀이었기에 곧장 선발 라인업에 낄 수도 있었고, 힘 하나만큼은 인정받는 처지였기에 중심타선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2할 대 초반의 1.5군급 타자'로 각인되어 있던 그를 두려워하는 투수들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앞 순번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알아줬던 거포 최희섭이 포진되어 있었고, 당연히 '최희섭만 피해가면 된다'는 필승 루트를 발견한 상대 투수들은 무수한 고의사구를 던져댔다.
그 때 김상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자기가 투수라도 최희섭 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만 감히 자신이 최희섭보다 못한 타자로 보이느냐고 항변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밀리고 몰리다 보니 한도 끝도 없이 자신을 우습게만 보는 세상과 자신의 운명 전체를 향해 이를 갈게 되는 남자의, 인간의 원초적인 오기. 그리고 그렇게 언제까지나 자기들 계산대로 될 거라는 듯 여유를 부리는 거만한 상대 팀들의 발걸음에 어떻게든 어깃장을 놓고 싶은 승부욕.
하지만 그가 그저 그런 분노와 흥분만 실어 방망이를 거칠게 휘둘러댔다면 그는 결단코 '공갈포'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변화구 대처능력이 부족해 '간혹 직구를 받아치면 끝도 없이 날아가는 타구를 날리지만 변화구만 던지면 만사형통'이라는 상대 투수들의 안일한 계산을 파고들어 오히려 변화구를 노리는 유연함.
그리고 홈런도 좋지만 단타나 희생타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응징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식혀내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는 '만루홈런의 사나이'가 되어 '시즌 MVP'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의사구라는 것이 나오는 상황도 다양하다. 그저 감당하기 어려운 강타자를 피해가기 위한 것도 있고, 타자와는 상관없이 비어 있는 1루를 채워 넣음으로써 병살을 노리기 위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고의사구는 피 말리는 승부이고 과감한 도박이며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한 명의 주자를 더 내보내고 주자들을 한 베이스씩 더 전진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쉬운 타자를 고르는, 그리고 조금이라도 병살의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선택이며, 선택한 타자를 향해서는 '칠 테면 쳐봐라. 너 정도는 병살로 잡아낼 자신이 있다'는 노골적인 도발을 던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의사구가 지시된 바로 다음 순간, 종종 그 경기의 분수령이 될 만한 대단한 승부가 연출되곤 한다.
역설적이지만 프로들의 승부가 흥미로운 것은 그 결과가 실력에 의해서만 갈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맞이하는 타자와 지켜보는 타자, 그리고 그것을 지시하는 감독과 배터리의 피가 끓어오르고, 거꾸로 치솟고, 말라붙는 순간.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어떤 이들은 야유를 퍼붓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또 어느 곳보다도 날카로운 승부처가 열린다는 것이 야구가 가지는 역설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김은식 야구작가
당시 金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과감한 도박이자 고도의 심리전
김은식 야구작가 |
그런 항복선언을 받아내는 타자로서는 타격 기회를 잃는 것은 아쉽더라도 일단은 아주 불쾌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최소한 2루 이상을 얻어낼 확률이 아주 높은 타자라는 점을 인정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앞 타자를 향해 고의사구가 던져지는 것을 지켜보는 후속 타자에게, 그것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앞에는 타점을 올릴 수 있는 '밥상'이 차려진다. 앞 타자가 내야안타나 상대방의 실책, 혹은 끈질기게 볼을 골라 출루한 경우와 상황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분은 완전히 다르다. 상대는 자신을 향해 '네 앞 타자는 무섭지만 너는 만만해'라고 시비를 걸어온 셈이고 끝내 범타로 물러난다면 눈앞에서 놓친 점수 한두 점을 떠나 상대의 노림수와 도발에 그대로 놀아나고 말았다는 불쾌함과 불길함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2009년 봄, 김상현은 십여 년의 프로생활 동안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유니폼만 두 번 갈아입고 친정팀 기아 타이거즈로 돌아와 있었다. 워낙에 빈약한 타선 탓에 8개 구단 최강의 선발진을 갖추어놓고도 연패와 역전패를 거듭하던 팀이었기에 곧장 선발 라인업에 낄 수도 있었고, 힘 하나만큼은 인정받는 처지였기에 중심타선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2할 대 초반의 1.5군급 타자'로 각인되어 있던 그를 두려워하는 투수들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앞 순번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알아줬던 거포 최희섭이 포진되어 있었고, 당연히 '최희섭만 피해가면 된다'는 필승 루트를 발견한 상대 투수들은 무수한 고의사구를 던져댔다.
그 때 김상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자기가 투수라도 최희섭 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만 감히 자신이 최희섭보다 못한 타자로 보이느냐고 항변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밀리고 몰리다 보니 한도 끝도 없이 자신을 우습게만 보는 세상과 자신의 운명 전체를 향해 이를 갈게 되는 남자의, 인간의 원초적인 오기. 그리고 그렇게 언제까지나 자기들 계산대로 될 거라는 듯 여유를 부리는 거만한 상대 팀들의 발걸음에 어떻게든 어깃장을 놓고 싶은 승부욕.
하지만 그가 그저 그런 분노와 흥분만 실어 방망이를 거칠게 휘둘러댔다면 그는 결단코 '공갈포'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변화구 대처능력이 부족해 '간혹 직구를 받아치면 끝도 없이 날아가는 타구를 날리지만 변화구만 던지면 만사형통'이라는 상대 투수들의 안일한 계산을 파고들어 오히려 변화구를 노리는 유연함.
그리고 홈런도 좋지만 단타나 희생타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응징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식혀내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는 '만루홈런의 사나이'가 되어 '시즌 MVP'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의사구라는 것이 나오는 상황도 다양하다. 그저 감당하기 어려운 강타자를 피해가기 위한 것도 있고, 타자와는 상관없이 비어 있는 1루를 채워 넣음으로써 병살을 노리기 위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고의사구는 피 말리는 승부이고 과감한 도박이며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한 명의 주자를 더 내보내고 주자들을 한 베이스씩 더 전진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쉬운 타자를 고르는, 그리고 조금이라도 병살의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선택이며, 선택한 타자를 향해서는 '칠 테면 쳐봐라. 너 정도는 병살로 잡아낼 자신이 있다'는 노골적인 도발을 던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의사구가 지시된 바로 다음 순간, 종종 그 경기의 분수령이 될 만한 대단한 승부가 연출되곤 한다.
역설적이지만 프로들의 승부가 흥미로운 것은 그 결과가 실력에 의해서만 갈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맞이하는 타자와 지켜보는 타자, 그리고 그것을 지시하는 감독과 배터리의 피가 끓어오르고, 거꾸로 치솟고, 말라붙는 순간.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어떤 이들은 야유를 퍼붓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또 어느 곳보다도 날카로운 승부처가 열린다는 것이 야구가 가지는 역설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김은식 야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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