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5]경방삼양그룹-④생산정비와 중국진출

중일전쟁 계기 만주에 터전
신흥 면사포시장 기업 확장

경인일보

발행일 2017-04-11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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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방적공장 자동직기 설치
길림·봉천 등 잇단 농장 개설
1939년 남만주 방적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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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 명예교수
경성방직은 1927년 4월에 조선총독부 보조금 2만7천원(현재가치로 2억여 원)을 받아 직기 104대를 증설했다.

하지만 장기안정경영을 위해서는 일관생산체제 구축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방직 등 일본계 방직업체들은 산하에 방적시설까지 갖추는 등 생산비를 절감하고 있었다. 방적시설이 없었던 경성방직은 생산비 측면에서 불리했다.

경성방직은 1931년 스위스 슐쳐(Sulzer)사로부터 발전기를 도입했고, 1933년에는 조선은행에서 50만원을 차입해 최신식 자동직기 224대를 증설했다. 1934년에는 방적공장 부지로 경기도 시흥에 15만평을 구입했다. 1935년 3월 김연수가 경성방직 2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자본금을 200만원(현재가치로 약 190억원)으로 증자했다.

1936년 2월에는 시흥에 방적공장을 착공하고 여기에 토요타식 직기 224대와 방기(紡機) 2만1천600추를 설치해 그해 가을부터 가동을 개시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일제가 1933년에 면화증산 및 공판제를 실시하면서 원면(原綿) 조달에 차질이 빚어졌다. 일제는 지역별로 면화 수매권을 특정 업자에게 독점시켰는데, 조선방직이 면화 생산량이 가장 높은 전라·경기·황해도 일대의 면화를 거의 독점했다.

경성방직은 1937년 12월에야 황해도 일부를 배정받아 남천에 조면공장을 지어 연간 500만근의 실면(實綿)을 생산했다.

1938년에는 황해도 은율에도 조면공장을 설치해서 연간 300만근의 실면을 생산했고, 1943년에는 삼성면업을 인수해 실면 연산 350만근의 평양조면공장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경성방직은 면사, 면포 등 생산을 다변화해 일본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삼양그룹의 성장은 중일전쟁(1937년)과 궤를 같이한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국대륙에 진출했는데 삼양그룹도 이에 편승했다. 김연수는 1921년에 만주시찰단 일원으로 참여해 사전답사를 마친 상태였다.

1936년 몇 차례의 만주 현지답사를 마친 후 1937년 12월에 만주 길림에 반석농장을 개설하고 700여 정보의 황무지 개간사업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만주 서쪽 영구(營口)에 천일농장을 개설했는데, 이 농장은 1941년에 총면적 1천782정보에 소작농 600여 호를 거느리는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했다.

1938년에는 반석농장 인근의 중국·일본인 땅 380정보를 매입해서 매하농장을 개설했고, 이어 봉천의 교하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을 연이어 개설해 만주일대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경성방직은 1920년대 후반 심각한 경영부진으로 고전하다 1931년 만주국 성립과 신흥 면사포시장 출현으로 또 한번 기사회생 한다.

경성방직의 '불로초'표 면포가 만주인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그 결과 경성방직의 매출액은 1934년 44만9천원, 순이익 4만7천원이었으나 1935년 매출액 53만7천원, 순이익 13만2천원으로 늘어난다.

일본군이 북경에서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로 급속히 진격하면서 북중국의 방적공업은 생산중단상태에 직면했고 경성방직의 판매시장은 광대한 중국대륙으로 넓혀졌다.

일본이 만주와 중국 지역 수출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자 경성방직은 1939년에 만주 봉천 근교의 교통요지인 소가둔(蘇家屯)에 공칭자본 1천만원, 납입자본 5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의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설립, 1942년부터 생산을 개시한다.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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