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6]경방삼양그룹-5대그룹으로 발돋움

금융업·언론 등 '경영다각화'
日강점기 복합기업집단 형성

경인일보

발행일 2017-04-18 제8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수직계열화 집중 경쟁력 확보
민족계기업 조선 민중과 밀접
지주 → 산업자본 대표적 사례


2017041601001107000054141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성방직이 중국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빠르게 성장해갈 무렵, 중앙상공도 안정된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중앙상공은 서울 쌍림동 공장을 피복공장으로 전환해 경성방직에서 조달받은 광목으로 학생복을 생산했는데, 여기서 만든 학생복이 중앙고보의 교복으로 사용됐다.

고무신 공장은 서울 양평동에 새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해 건평 1천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했다. 이로써 중앙상공은 고무신, 운동화, 방한화, 고무호스 등을 생산하는 종업원 500명의 국내 최대 고무공장으로 부상했다. 태평양전쟁 중에 쌍림동 공장은 일본 육군용 군복생산공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45년 1월에는 동광생사주식회사(납입자본 200만원, 의정부 소재, 생사 및 견직물 생산)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중앙상공은 자본금 1천300만원의 우리나라의 중추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이무렵 삼양사도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8년에 해동은행의 후신인 자본금 200만원의 해동금융주식회사를 인수해 새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해동은행은 1920년에 민철훈, 윤덕영, 심상익 등 귀족들이 자본 200만원(50만원 불입)으로 설립했으나 내부 알력으로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27년에 김연수가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으나 규모가 영세함을 면치 못하자, 1938년에 은행업무를 한성은행에 양도하고 상호를 해동금융주식회사로 개명하면서 삼양그룹이 인수했던 것이다. 또한 삼양사는 1941년에 삼양상사주식회사를, 1943년에는 합자회사 삼양상회를 각각 자회사로 설립함으로써 점차 지주회사로 발전해 갔다.

경성방직 역시 다각화를 추진했다. 1941년에는 자본금 19만원의 삼성면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4년에는 시흥에 별도로 표백·염색공장을 증설했다. 경성방직은 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수직계열화에 주력하면서 해방 직전에 국내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관계사로 삼양사, 남만주방적, 중앙상공, 해동금융, 동아일보, 고려중앙학원 등을 거느리는 등 일제치하의 민족계 기업들 중 가장 먼저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했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으로는 매우 드물게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경성방직그룹이 일제의 각별한 비호를 받았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민중과의 유착이 훨씬 두드러진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선 민중은 핍박했어도 조선인 대지주와 대표적 기업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식민통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활동한 절대다수의 한국인 엘리트들이 해방 이후 친일파로 매도되어 수모를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김성수는 호남의 대지주 출신에다 한국민에 영향력이 큰 명망가여서 일제 입장에선 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경방삼양그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업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특수은행의 융자나 총독부의 정책자금 수혜 등이 그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 토착기업들은 식민지정책에 철저히 동조하는 예속성 내지는 민족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였던 것이다. 한국기업 역사상 경성방직은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최초이자 대표적 사례였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