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7]경방삼양그룹-6 최대의 위기

해방 후 관리불가 北·中 공장
종업원만 남한 이송 '큰 손실'

경인일보

발행일 2017-04-25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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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사업장 자주관리운동 확산
'반민족행위자' 처벌 요구 커져
김연수, 2달 감금 '시련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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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1945년 8·15 해방으로 경성방직그룹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북한에서 1948년 9월 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탄생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을 장악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중국대륙 전체가 붉게 물들고 말았던 것이다.

경성방직그룹은 평양, 남천, 은률 등지의 조면공장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하게 됐다. 중국에는 더 많은 시설들이 있는 것이 문제였다. 종업원 1천여명의 남만주방적을 비롯해 삼척기업, 오리엔탈비어 등이 생산활동 중이었다.

또한 삼양사 소속의 영구 천일농장, 매하농장과 봉천의 교하농장, 반석농장, 길림의 구대농장 등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들만 겨우 남한으로 이송시켰을 뿐 대부분의 재산이 부동산이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의 사업장에도 해방 후 광풍이 몰아쳤다.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관리위원회를 결성해 경영하는 자주관리운동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경방 근로자들도 재고품의 분배를 요구하면서 파업을 선동하는 등 경성방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 사상적 색채를 띤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경성방직을 통째로 종업원들에게 넘기라는 요구였다. 삼양사의 여러 농장에서도 몇몇 직원들이 소작인들을 선동해서 오너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 3월부터 실시된 농지개혁은 설상가상이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하에서 정부가 지주들에게서 강제로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고율 소작료로 신음하는 소작농들에게 경작지를 되돌려준다는 취지였다.

삼양사 소유의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영광농장, 법성농장, 손불농장 등 총 수확 15만석 규모의 농경지가 한꺼번에 정부에 넘어갔다. 농사기업이었던 탓에 삼양사의 자산은 사실상 8·15 해방과 6·25 전란으로 거의 없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김연수는 개인적으로도 인생최대의 고비를 맞이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요구가 비등했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국회는 단기4278(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정부는 특별법인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1948년 9월 22일에 법률 제 3호로 공포했다. 이어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는데, 김연수는 1월 21일에 연행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죄목은 단기4266년 4월말에 경기도 관선도평의원에 피선, 4272년에 만주국 명예영사에 피선, 4273년에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피임, 4273년 일제의 전쟁완수에 적극협력을 목적으로 결성한 임전보국단 간부에 피선, 4275년 초에는 조선인을 총동원하자는 취지의 국민총력동맹 후생부장 역임 등이었다.

당시 경성방직의 상무이자 김성수·연수 형제의 매제였던 김용완은 김연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와중에서 큰 처남인 김성수를 찾았으나 주변 인사들이 면회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김연수는 엄동설한을 감방에서 보내는 동안 발에 동상이 걸렸고 그로 인해 발톱이 몽땅 빠졌다. 구금 2달여 만인 3월 28일 제3부 공판에서 구속취소 판결을 받아 무죄로 방면됐지만, 김연수는 해방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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