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6]근대 여행서사의 탄생 '80일간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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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여행은 현실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우리가 꿀 수 있는 최고의 로망이다. 산문적 일상과 나를 둘러싼 책임과 의무들로부터 벗어나 단숨에 마술적 자유와 즐거운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기차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의 등장은 인류에게 여행할 권리를 크게 신장시켜주었으며, 어느새 그것은 자아의 성장과 낭만과 휴식과 모험의 동의어로서 근대인들의 꿈이 됐다.

특히 식민지 세계 경영이 보편화하고 거대한 근대적 교통·물류 체계가 완비된 제국주의 시대 우리 안의 자유와 탈주의 갈망은 더욱 촉진됐고, 이를 소설화한 여행의 서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계SF의 선편을 쥔 쥘 베른(1828~1905)의 '80일간의 세계일주'(1873)는 신비와 미지와 자연적 속박에 갇혀 있던 지구 전체가 이제 여행과 모험을 위한 공간으로 최적화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천로역정' '신밧드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등처럼 종교적 열정으로 충만하거나 초자연적 신비가 작동하는 前근대서사와 결별하고, 여행도 철저하게 계산과 시간 예측 같은 합리주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크로노미터처럼 정확히 일정한 시간에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하고 '면도를 위해 화씨 84도의 물'만을 사용하는 기계적 인간, 곧 19세기 근대의 메타포이다.

포그는 영국의 상류계급 남성들의 사교모임인 '개혁클럽'에서 80일 만에 세계일주가 가능한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거액이 걸린 내기에 휘말려든다.

그는 하인 파스파르투(만능열쇠, '무엇이든 다하는'의 뜻을 지닌 불어)와 함께 기차·증기선·기구·코끼리 등 현존하는 모든 이동수단을 총동원하며, 도중에 위기에 빠진 인도 왕족 출신의 과부 아우다를 구해주고 결혼을 언약한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런던-수에즈-봄베이-캘커타-홍콩-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뉴욕-런던으로 이어지는 포그 일행의 여정이다. 주어진 기간 내에 여행을 완수해야 하는 포그에게 이 공간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야할 경로로 묘사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80일이라는 기간, 오직 시간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포그의 이동경로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여행지는 영국의 식민지이거나 그 영향 아래 있는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곧 포그의 여정은 자본의 식민지 순례 여행의 성격을 가진다. 비록 작품에서 인물과 국적이 영국으로 설정돼 있으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철저하게 프랑스적이다.

이 모험소설이 프랑스가 식민지 세계경영에 주력하면서 파리를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올려놓은 제2공화국(1848~1852)의 정치상황과 이념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평론가 피에르 마슈레(1938~)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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