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6]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이인창 할아버지 (中)

연중기획 실향민 이인창 할아버지11
이인창 할아버지가 옛사진이 담긴 낡은 앨범을 뒤적이며 1950년대 버스기사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제대후 서울버스 기사 취직 '마포~홍릉' 운행
군용 트럭 버스로 탈바꿈한 재생자동차 몰아
당시 운수회사는 개인車 공동출자 형식 운영
금품갈취 깡패 기승… 전차 폐지후 승객 넘쳐

1920년대말부터 인천·월미도서 서울행 다녀
인천~서울 구간 '지정좌석제' 최초 도입 눈길
한진그룹도 트럭 1대로 인천서 수송업 시작
회사임원 거쳐 은퇴후 부평 정착 "고향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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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부대원으로 참전했던 실향민 이인창(88) 할아버지는 제대 후 서울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취직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부터 군 생활까지 쭉 운전했다는 것을 아는 친척이 버스회사를 소개해 줬다.

이인창 할아버지가 서울 땅을 밟았을 때는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5년 봄이다. 전쟁통에 자동차 대부분이 부서져 시내에서는 군용차가 아니면 자동차를 구경하기 어려웠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이 쓴 책 '고종 캐딜락을 타다'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까지 남한에서만 1만6천여 대에 달했던 자동차는 약 80%가 파손돼 전쟁 직후 군용차를 제외하면 고작 4천여 대만 남았다. 그만큼 대중교통이 귀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마포 종점에서 출발해 종로·청량리·동대문을 거쳐 홍릉까지 가서 마포로 되돌아오는 버스를 몰았어. 그때 시내버스는 전부 정비소에서 미군 재무시(GMC) 트럭을 개조한 거야.

엔진이랑 차대를 떼다가 도라무깡(ドラムかん·드럼통의 일본말)으로 만든 껍데기를 씌웠어. 도라무깡을 달구면서 망치로 살살 펴서 지붕이니 문짝이니 만들었고, 의자도 다 조립했지. 3개월이면 기가 막히게도 버스 한 대가 뚝딱 나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재주가 참 좋아."

전후 폐허 속에서는 자동차를 제작할 만한 원자재도, 공장이나 기계 설비도, 자금도 없었다. 차량이나 부품을 수입해서 쓰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서울 등 대도시로 몰리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싣고 다닐 차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할아버지가 운전한 일명 '재생자동차'는 그런 상황에서 나왔다.

1950년대 말까지 전국의 정비업소와 운수회사들은 미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해체하고, 쓸만한 부품을 골라내 재활용하는 과정을 거쳐 자동차로 재생했다. 제너럴 모터스가 생산한 2.5t짜리 군용 'GMC 트럭'은 40~50인승 버스로 탈바꿈했고, 중형인 '쓰리쿼터(3/4t) 트럭'은 '합승택시'라 불린 12~25인승 버스로 변신했다.

어려웠던 당시는 새로운 물자를 구하긴 어려웠지만, 폐품은 풍부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휴전까지 3년여간 우리나라에 들어온 군용차는 총 3만8천75대라고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지원사'에 나온다.

군용차들이 전쟁의 와중에 폐차되거나 수리 도중에 부품이 민간으로 흘러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류를 담은 드럼통은 차체로 활용했고, 군용차의 천막 지붕이나 군용텐트는 짚과 용수철을 넣어 차량 시트로 썼다.

이런 재생자동차는 1962년 11월 일본 자동차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한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인천 부평에 설립되기 전까지 국내 자동차산업을 이끌었다.

이른바 '일본제 국산차'인 새나라자동차는 부평공장에서 2천770여 대를 생산했으나, 외화낭비 지적과 면세 특혜논란 등으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3년 7월 문을 닫았다. 이후 소형·대형버스를 제작하던 신진공업사가 '신진자동차공업(주)'로 확대돼 1966년 옛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에 터를 잡고,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어 소형차를 생산했다.

신진자동차는 현대자동차(1966년 설립), 아시아자동차(1968년 설립) 등과 함께 1970년대 '국산차 삼국시대'를 열었고,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꿨다가 대우그룹이 인수해 1983년 대우자동차가 됐다. 현재 대우차 부평공장의 주인은 대우그룹 부도사태로 2002년 대우자동차를 흡수한 한국지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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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이인창 할아버지(사진 오른쪽)가 구입해 몰고 다녔던 서울 시내버스. 미군용 GMC 트럭 엔진과 차대 등에 드럼통을 펴서 만든 외관을 씌운 '주문제작방식'의 재생 자동차다. 노선번호가 없이 '마포~홍능'이라고 적힌 버스는 지붕 모서리 쪽에도 유리창을 낸 디자인이 독특하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멋을 내려고 버스제작 주문을 할 때 지붕에 창을 낸 건데, 나중에 서울시에서 승객이 위험하다고 금지했다"고 말했다. 사진/이인창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전쟁 후 우리 자동차산업은 제너럴모터스(GM)사의 미군 GMC 트럭 개조에서 출발해 일본제 조립차를 거쳐 전 세계에 수출하는 자동차를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자동차의 본향인 인천에 현재 국내 기업이 아니라 1950년대처럼 또다시 제너럴모터스(한국지엠)가 들어서 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50년대 시내버스 운수회사는 한 사람이 경영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각자 소유한 버스를 공동출자하는 형식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일종의 '지입제'인데, 버스가 곧 지분이었다.

이인창 할아버지도 계를 조직해 마련한 돈으로 개인소유 재생 시내버스를 사서 몰고 다녔다. 차비를 받는 안내원 겸 정비원인 조수는 할아버지가 직접 고용했다.

당시 버스기사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는 깡패도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7년 12월 8일자 신문에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한 시내버스회사 주차장에 깡패 7~8명이 나타나 술값을 요구하며 버스 4대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고, 직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나온다.

"자유당 정권이라 깡패들이 우글우글했어. 마포 종점에서도 깡패들이 하도 버스를 뜯어먹어서 내가 대표로 나서서 협상했어. 버스에서 신문을 파는 권리를 주는 대신 상납금을 줄여달라고 하니까 그놈들이 승낙하더라고."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의 주요 대중교통수단이던 전차수요는 전쟁 이후 점점 줄다가 1968년 노선이 전면 폐지됐다. 1974년 지하철이 개통하기 전까지 시내버스는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이었다. 서울의 중심 노선을 달리던 이인창 할아버지의 버스도 '러시아워'때면 승객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좌우간 안내원이 사람이 꽉 차서 숨을 못 쉴 정도로 버스에 승객을 밀어 넣었으니까…. 신촌에서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많이 탔는데, 커브를 돌 때마다 남자들한테 치이니까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지."

인천의 대중교통 버스는 언제부터 운행하기 시작했을까. 적어도 1920년대 말부터 인천에서 서울을 오간 버스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28년 6월 18일자에는 경성(서울)에 사는 임씨라는 사람이 경성~인천 간 버스영업을 처음으로 허가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기사는 '경인 간으로 말하면 매일 12회 기차 발차가 있지만, 오히려 불편을 느낄 만큼 교통이 빈번할 터인데, 이제 뻐스 통행으로 경인 간 교통이 한층 원활케 할 모양이라더라'고 전했다.

이듬해에는 경성과 월미도 간 버스도 개통했는데, '기차와 경쟁하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월미도는 바닷물을 호텔 앞에 가둬 만든 '조탕(朝湯)'이라는 시설로 수도권 인기 관광지였다. 특히 당시 월미도는 '유흥'과 '불륜'의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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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창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운수회사 동료의 버스 앞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진. 이인창 할아버지 소유 버스와는 외관이 다르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서울 마포종점에 있는 운수회사 주차장 인근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서울시내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인창 할아버지 제공

당시 서울에서 월미도까지 경인철도를 타고 가느냐, 버스를 타느냐의 문제는 '속도'와 '비용' 간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1934년 2월 13일자에 낸 '경인뻐스로 철도국이 두통'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경성~월미도 간 버스 운임은 63전이고, 철도 운임은 70전이라 훨씬 빠른 기차를 버리고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1934년 쓴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주인공 구보가 경성역에서 애인과 함께 월미도로 놀러 가는 동창을 만난다. 아마도 구보의 동창은 애인에게 체면을 차리고 싶은 마음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한 버스보다는 기차를 택했을지 모른다. 소설 속 구보는 이렇게 상상한다.

'이러한 시각에 떠나는 그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를 그곳에서 묵을 게다. 구보는 문득, 여자의 발가숭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애무할 그 남자의, 야비한 웃음으로 하여 좀 더 추악해진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그리고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기차처럼 좌석을 지정해 버스표를 파는 '지정좌석제 버스'가 전국에서 처음 도입된 노선도 인천~서울 간 버스다.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趙重勳·1920~2002) 회장이 1961년 8월 주한미군에서 2년마다 교체하는 통근용 버스를 불하받아 지정좌석제 버스사업을 시작했다.

만원버스나 만원열차에 시달리던 인천시민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한국 수송의 거목(巨木)이라 불리는 조중훈 회장이 일군 한진그룹은 인천에서부터 그 뿌리를 뻗어 나갔다. 조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5살 나이에 인천 중구 해안동의 한 창고에 '한진상사'란 간판을 달고, 트럭 1대로 수송업을 시작했다.

주로 인천항에 드나드는 화물을 실어날랐다. 5년 뒤에는 종업원 40여 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조중훈 회장은 1996년 낸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인천을 새로운 사업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중국과의 교류를 겨냥해 무역업에 뛰어들려는 생각에서였다"며 "인천은 한강 유역에 걸쳐 있는 수도의 관문으로, 각종 산업물자가 조달되는 곳이었다"고 했다.

이인창 할아버지는 1970년대부터 버스회사 노선 상무를 맡아 임원으로 올라서면서 운전대에서 손을 놨다. 할아버지는 환갑이 지나 은퇴한 뒤 1992년부터 인천 부평구에 정착했다.

아들이 부평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부인을 만난 것도 인천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당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에서 감독 일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1950년대 버스회사 취직 전 군대에서 상관이던 사람의 사업을 잠시 도운 적이 있다. 인천 화수부두에서 새우젓 등을 떼다가 서울 중부시장이나 가락시장에 팔았는데, 화수부두 단골 순댓국집 사장이 장모가 되었다.

"장모님이 된 순댓국집 사장님이 나를 착실하다며 좋게 봤어. 이북에 가족을 두고 왔으니 자기 딸과 서로 위로하고 살아보라고 직접 중매를 섰지. 딸 시집살이할 걱정 없어서 혈혈단신인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몰라(웃음).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은퇴하고 인천으로 내려와 여태까지 살고 있어. 이젠 인천이 고향 같고 편해."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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