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8]경방삼양그룹-7 제당업 진출

지가증권 모두 처분 '승부수'
울산 앞바다 매립·공장 건립

경인일보

발행일 2017-05-0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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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삼양설탕' 생산 개시
제일·대동제당과 '과점 체제'
日 600t, 국내 최대공장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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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삼양사는 해방 이후 첫 사업으로 1946년 6월 12일 전매 제2호로 전북 고창 해리농장에 대한 제염업 허가를 얻었다. 해리농장은 1936년 일본인 소유의 해원(海元)농사주식회사가 간척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방치한 것이었다.

1947년부터 해리농장의 미간척지에 대한 염전축조에 착수해 1949년에 1차로 52.7정보의 염전을 완성하고 천일염 8천998가마를 생산했다. 민영염전의 효시가 된 해리염전은 삼양사의 자금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말에 해리염전은 총면적 300여 정보에 식염을 연간 2만5천톤 생산하는 대염전업체로 성장했고, 삼양사는 1956년 6월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로 분사했다. 삼양사는 이와 별도로 1953년 3월 17일에는 삼양통상 발족과 함께 전남 목포에 서남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장차 수산업 진출에 대비했다.

6·26전쟁 때 김연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규사업으로 제당과 과학한천(우뭇가사리) 생산에 도전했다. 해방과 함께 설탕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했으나 수입만으로는 설탕의 국내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절이어서 설탕 수입에 따른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 유출도 주목됐다.

우뭇가사리는 홍조류에 속하는 해초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해초를 삶아 끈끈한 액체를 추출해 얼려 굳힌 다음 말려서 우무묵과 우무채, 우무장아찌 등을 만들었고 부녀자들의 머리장식으로도 사용했다.

수요가 많지만 지형, 토양, 하천수 등의 까다로운 입지조건과 한겨울에만 생산이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어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전세계 총수요량은 연 3천톤 이상이었으나 90%가 일본제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제당 및 과학한천의 제조에는 해안이 최적지였다. 제당공장 가동에는 풍부한 냉각수가 필요할 뿐 아니라 원료입하 및 제품수송의 편리성도 고려해야 하는데 부산에는 공장을 세울만한 공지가 전혀 없었다.

김연수는 주위의 반대에도 습지와 갈대밭으로 우거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앞바다를 매립하기로 하고 1954년 3월 10일에 23만1천㎡의 매립허가를 얻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시 김연수의 수중에는 6·25전쟁 전에 농지개혁으로 모든 농장을 정부에 넘기고 받은 지가증권 뿐이었다. 그는 지가증권을 전부 처분했는데 액면가의 70% 내지 심지어 30~40%에 처분했다.

과거 함평과 해리 간척공사로 옥답(沃畓)과 염전을 조성했던 경험을 살려 1954년 6월 1차로 부지 4만3천560㎡의 매립공사와 함께 7천134㎡의 공장과 창고, 기관실 등을 준공했다. 제당공장 설계 및 과학한천의 생산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1955년 12월에는 서독 BMA사에서 도입한 하루생산량 50톤의 기계를 설치하고 1956년 1월 3일에 쿠바산 사탕수수를 원료로 한 '삼양설탕' 생산을 개시했다. 이후 제당업체의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으로 동양제당, 금성제당, 한국제당, 해태제과 제당부가 차례로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제당업은 제일제당과 삼양사, 대동제당 등 3사의 과점체제로 정리됐다. 삼양사 공장은 1971년에는 하루 생산량 600톤의 증설공사를 통해 국내 최대의 단일공장으로 발돋움 했으며, 1973년에는 59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삼양사 여수공장을 건설해 사업을 넓혔는데, 자회사인 삼양수산을 흡수합병해서 마련한 수산물 냉동냉장 및 제빙공장이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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