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누구인가]정치 싫다던 인권변호사 '절친' 노무현 前 대통령 따라 대권 잡다

황성규 기자

발행일 2017-05-10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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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누구인가
문재인 당선인이 경남 양산 자택에서 아내 김정숙 여사와 함께 반려견 풍산개 '마루'를 어루만지며 활짝 웃고 있다. 마루가 '퍼스트 도그(first dog)' 자격으로 청와대에 입성할 지 관심이다. /문재인 당선인 측 제공

유신반대 학내시위 주동하다 체포, 특전여단 강제 징집 혹독한 훈련
유치장서 사시패스 통지받아… '인권변호사' 길 걸으며 盧와 첫 만남
참여정부때 민정수석 → 시민사회수석 → 비서실장 "성공·좌절 교훈"
盧 서거후 다시 정계로… "두 번 실패 없다" 재수끝에 청와대 재입성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된 문재인 당선인은 인권변호사를 시작으로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거쳐, 두 번의 대권 도전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 가난한 소년 독서로 세상에 눈뜨다

문 당선인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허름한 시골농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한국전쟁을 피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그의 부모가 처음 정착한 장소였다. 이후 그의 가족은 당시 피란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도지역은 고갈산 아래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비탈진 언덕에 얼기설기 판잣집이 들어서 있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 아버지는 장사를, 어머니는 연탄 배달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고 예닐곱 살의 당선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곤 했다.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그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 회고했다.

당선인은 부산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경남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와 달리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방황하던 시절 그를 잡아준 것은 독서였다. 지식에 갈증 난 소년은 늘 책이 모자랐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늘 학교도서관에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그는 이처럼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와 인생을 익히고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선인은 이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 경희대 운동권 학생의 극적인 사시 패스

당선인이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본격화되던 때다. 이듬해인 1973년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면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고, 당선인은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됐다.

당시 구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이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됐다. 그리고 1975년 그는 석방과 동시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결국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당선인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됐다. 군인 문재인은 폭파, 화생방,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훈련 등 다방면에서 '특A급' 사병이었다.

1978년 2월 만기 전역 이후 사회에 돌아온 그가 마주한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더욱이 갑작스레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남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에 그는 주저앉을 수 없었고, 결국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 날 그는 곧바로 전남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 공부에 매달렸고 1979년 초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10·16 부마항쟁,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등이 잇따라 터지며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했고 결국 고시 공부는 뒤로 한 채 1980년 학교로 돌아온 그는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 섰다.

경희대 운동권의 핵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면서도 그동안 준비한 공부가 아까웠던 그는 학내시위 도중 2차 시험을 치렀고, 1980년 드라마처럼 경찰서 유치장에서 2차 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학창시절(2)
학창시절의 문재인 당선인(윗줄 가운데).

# 인권변호사의 길…노무현을 만나다

당선인은 사법연수원 시절 7년간 연애를 이어 온 대학 2년 후배 김정숙 씨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해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고승덕 전 의원 등 연수원 내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도 그는 발군의 기량을 뽐내며 차석의 성적으로 연수원을 수료했다.

하지만 그는 판사를 지망했음에도 과거 시위 전력 탓에 임용에서 탈락했고,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국내 최대 대형 로펌의 제의마저 뿌리친 그는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고 운명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동업자로 만난 두 사람은 점차 일을 넘어 삶의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갔다. 노무현·문재인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 인근 울산·창원·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사건 총괄 센터를 방불케 했다. 이처럼 그는 각종 노동인권 사건을 총괄하며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놨다.

당선인은 그의 저서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한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온 동안의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밝혔다.

#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다

참여정부 시절 그는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등 참여정부의 출범부터 마감까지 함께했다.

그는 "어느 정부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며 "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차분한 성찰과 복기를 통해 오류와 한계는 겸허히 인정하고 성공과 좌절의 교훈을 얻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당선인은 과거 청와대 시절 누구보다 대쪽 같았다고 전해진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이었던 특혜를 철저하게 내려놨을 뿐 아니라, 업무시간 외에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 역시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청와대 생활 1년 만에 과로로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로 국정 업무에 집중했다.

그는 과로 탓에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돌연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하지만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그는 곧장 귀국해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탄핵 재판 이후 결국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으며,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3월 비서실장에 오른 문 후보는 당시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참여정부의 마감과 함께 청와대를 떠난 당선인은 경남 양산의 시골집으로 돌아와 일반인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그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다시 정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게 각인됨과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불의에서 오는 상실감이 그를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오게 했다.

가족(2)
슬하에 1남 1녀를 둔 문재인 당선인.

#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향한 도전, 그리고 실패

당선인의 주변에서는 그가 살아온 삶이 가장 정치적이었지만 가장 비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정치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정치 신인이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노무현이 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좁은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민주당을 외면하지 않은 채 민주당의 가치를 지키며 부산에서 당선됐다. 그리고 총선 승리 두 달 만에 그는 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현실 정치인이 된 지 고작 두 달 된 정치 신인이 대권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지만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그는 100만 국민이 참여한 당내 국민경선에서 모두 1등을 차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정권교체·정치교체·시대교체 등의 가치를 내걸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던 그의 야심찬 도전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 와신상담 재도전 정권교체로 결실

대선 패배 이후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낸 그는 결국 다시 한 번 국민의 심판대 앞에 섰다. 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한 국민들의 고통은 5년 전 정권을 쟁취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19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순간부터 그를 따라다닌 대세론은 경선은 물론 본선에서도 굳건히 이어졌다.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그의 각오는 끝내 현실로 이뤄졌다.

당선인은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희생정신이 마침내 권력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라며 "기꺼이 국민의 촛불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

문재인 당선인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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