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데스크 칼럼]70년 동안 가지 못한 엽서 한 통

한국전쟁때 부부의 애틋한 연정 담긴 편지
혹시나 트럼프가 '러시아 스캔들' 돌파구로
한반도 택하지 않을까 엉뚱한 걱정 앞선다


정진오 사진(새 데칼용)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여기 엽서 한 통이 있다.

가을이 되었구려. 편지를 두 번 했는데, 갔는지. 나는 몸 성히 일을 보고 있습니다. 모두 당신이 염려하여 주는 덕택이요. 아이들은 잘 있는지. 폭격에 고생 많이 하겠소. 조석 식사가 걱정이겠습니다. 이곳 상급을 통하여 그곳으로 생활에 대한 수속을 하여 보겠소. 당신이나 나나 원수를 거꾸러뜨릴 때까지 고생하며 분투합시다. "정애의 건강을 빌며" 끝.



67년 전인 1950년 9월 18일, 전쟁의 와중에 황해도에 나가 있던 남편이 인천의 아내에게 보낸 것인데 전달되지 못했다. 부부의 애틋한 연정이 짧디짧은 글에 녹아 있다.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엽서 한 장은 또한 당시 시대상도 조금은 엿보게 한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 중 편지들을 골라 묶어 펴낸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란 책에 실렸다. 이 책의 별책 주소록에 있는 바로는 황해도 벽성군의 문규원 씨가 경기도 인천시 관동 2가 2 문규원 씨 앞으로 보냈다. 아마도 인천에 자신의 명패가 달린 집에서 살던 남편 문규원이 전쟁 통에 황해도로 넘어간 듯싶다.

엽서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남편은 '상급을 통하여 그곳으로 생활에 대한 수속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 벽성군의 북한 쪽 어느 기관에서 일하는 듯하다. '아이들의 안부'를 언급하고 있으니 끝 부분의 '정애'는 부인의 이름일 터이다. '가을이 되었다'고 했으니 한국전쟁이 터진 6월 25일 직후 여름에 집을 나가 계절이 한 번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엽서를 부친 9월 18일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나서 사흘 후이다. 인천에서는 인민군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다. 부인 '정애'와 아이들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런데 남편 문규원은 인천에 여전히 폭격이 가해지는 것으로 알 뿐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성공했음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이들 문규원 씨 가족은 만났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이산가족으로 남았을까. 궁금하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하나 있다. '조석 식사'. 지금 같으면 '세 끼 식사를 해결하느라 얼마나 힘이 드느냐'고 해야 할 것을 '조석 식사가 걱정이겠다'고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도회지 인천에서도 하루 세 끼 식사가 보편화 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아침과 저녁에만 가족끼리 둘러앉아 정식으로 밥을 먹었을 뿐, 지금처럼 점심까지 먹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루 세 끼니는 출퇴근이 본격화한 현대적 개념이라고 한다.

이 엽서 한 장을 보고 있노라니 엉뚱하게도 자꾸만 미국 생각으로 옮아간다. 이 엽서를 고이 보관한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이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 것인지를 막론하고 기록을 보존하려는 미국의 그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다. 혹시라도 '러시아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문제 해결의 돌파구로 한반도를 택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드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다. 지금까지 미국이 수행한 여러 전쟁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럴 만한 개연성은 충분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의 와중에 편지가 오가는 상황이 또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70년 가까이 배달되지 못한 이 엽서 한 장은 우리에게 다시는 이런 엽서가 쓰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웅변한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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