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인천 중구 |
기자의 설명과 함께 행주산성과 주변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파노라마 사진으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선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의 상황을 추상할 수 있었던 사진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행주현과 고봉현이 1393년 통합된 고양군 행주산성은 왜군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1592년 5월 서울은 왜군들에게 점령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서울 성곽 안에서는 유수대장 이양원이 병력 3천명과 선조 임금을 보위하며 지키고 있었고 성 밖에서는 원사 김명원, 부사 신각이 병력 1천명으로 서울을 수비하고 있었다. 충청도에 주둔하고 있는 신립 장군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왜군의 일부는 양지~용인을 거쳐 경기 광주 제천정(루정)을 지나 서울로 진입하고 있었다. 성 밖에서 서울을 수비하고 있었던 김명원과 신각은 병력수에 밀려 왜군들과 제대로 격전을 겨루지 못하고 양주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한 왜군들도 합세하여 동대문에 모인 병력이 1만5천명이라는 소식을 들은 유수대장 이양원은 병력과 함께 선조 임금을 호위하며 피신하게 되고 왜군들에게 완전 장악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행주산성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창릉천이 있으며 전면으로는 늪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천혜의 군사기지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권율 장군은 서울 탈환진격에 나서며 휘하병력 2만명을 이끌고 수원 독성산성에서 출발하여 시흥(금천)~양천~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도착, 진지를 구축하며 경계에 나선다.
서울 근교에서는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왜군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진격하려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수사 정걸이 강화도로 가서 수군들과 한강진입로를 봉쇄하고 경계에 나서고 있었다. 통진에서도 충청감사 허기가 주둔하며 서울을 측면으로 협공하는 군사작전이 있었다. 행주산성으로 권율 장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왜군들은 행주산성을 탈환하려고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군의 병력 3만명이 행주산성을 포진하고 있었다. 풍신수길(당시 57세)이 조선에 보낸 왜군병력 10만명 중 수군외 육군의 병력이 행주산성으로 모인 것이다. 행주산성을 공격하려는 왜군들의 왜장은 모두 7명이었다. 풍신수길 휘하 최정예 왜장들이다. 이 중에 고려멸망 후 일본으로 귀화한 고려인의 후손 2명이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있어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조방장 조경의 발상으로 성책(城柵)을 만들었다.
행주산성앞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왜군들의 진격을 더디게 막아보자는 생각으로 병사들과 3일 동안 완성하고 왜군과의 대격전을 벌인 것이 행주산성 전투다.
전략·전술이 앞서 있는 권율 장군 병력은 대포구, 동포, 홍이포, 순환포, 호준포(수륙양용), 자포, 진천뢰, 화포 불랑기와 승자총, 천자총, 지자총, 현자총의 무기류도 보유하고 있어 총과 칼만으로 무장하고 병력 수만 앞선 왜군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추운 겨울철인 1594년 2월 12~16일 5일간 전투는 주로 서쪽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왜군들을 전멸시키고 승리한 권율 장군은 성책을 설치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공을 세운 조방장 조경을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퇴각한 왜군의 왜장들은 수군에 있어서는 충무공 이순신, 육군에 있어서는 권율 장군의 군사적 전략, 전술에 감탄했다는 일본전쟁사 사료도 있는 행주산성 전투 때의 권율장군 나이 57세였고 임진왜란 주동자 풍신수길이 63세로 숨진 해 권율장군도 63세에 숨졌다. 행주산성 파노라마 사진을 보며 당시의 전투 상황을 추상해 봤다.
/이강동 인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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