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시기상조의 나라

신형철

발행일 2017-06-02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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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결혼·커플 법적 인정 44개국에 달해
한국, 관용·성숙지표 44위 안에 왜 못드나
정신적 진보수준 하위권 탈피 아직 이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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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
시기상조라는 말은 듣기에 착잡하다. 당위성과 필요성은 인정하되 실행은 나중으로 미루자는 뜻이다. '미루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 일이 정말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조건이 무르익는 때를 기다려야지, 섣불리 밀어붙였다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그 실패의 충격이 재기의 기회마저 앗아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이 말은 옳다. 문제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 즉 사실은 그 계획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끔 전자의 흉내를 내며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시기상조 리스트'가 있어 왔고 지금도 있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다, 일본문화 개방은 시기상조다, 공무원의 노동조합가입 허용은 시기상조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기상조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시기상조다, 공교육 현장에서의 체벌금지는 시기상조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시기상조다…. '시기상조의 현대사'를 서술해볼 수 있을 정도다. 이중에는 이제 시행된 것도 있고, 아직도 '시기가 상조하여' 여전히 제자리인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놀랍게도 그 나라들은 망하지 않았다.

최근 한 성소수자 군인이 영외에서 합의하에 행한 성행위를 군 당국이 문제삼아 결국 그는 실형을 선고받았고 법정에서 졸도했다. 이제 성소수자 군인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처벌받고 가도 처벌받는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호모포비아들은 차치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안타깝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다'라는 입장을 말하고 있으니 시기상조 리스트는 또 한 줄 늘었다. 세계최강군인 미군은 군인의 성적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가하지 않으며 동성애자인 장성까지 있는데 왜 우리는 시기상조인가. 동성애자들에게도 국민성이 있어서 우월한 미국은 돼도 열등한 한국인은 안되는 것인가.

시기상조가 아니라 만시지탄이다. 서구사회가 동성애는 '질환'이 아니며 따라서 '치료'의 대상도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에 도달한 것은 1970년대다.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정체성'이므로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세계의 사회적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대한민국의 몇몇 목회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월급을 받아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그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도 감히 하기 힘든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니 성소수자들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

지난 대선 토론 때 논란이 된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 역시 그렇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에서 제작한 자료집에 따르면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는 영국·미국·프랑스·아르헨티나 포함 23개국이며, 시민 결합제도를 통해 동성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까지 포함하면 총 44개국이 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은 왜 이 같은 관용과 성숙의 지표에서는 44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나라여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물질적 진보말고 정신적 진보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순위 하위권에 속한다. 그 처지를 벗어나는 일도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어슐러 르 귄의 유명한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미래 세계의 어느 작은 나라 '오멜라스'가 얼마나 풍요로운 나라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돼 있다. 그러나 그 전반부는 후반부의 끔찍한 진실과 대조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오멜라스의 어느 지하실에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이가 짐승처럼 묶인 채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아이 하나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오멜라스의 그 풍요로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비열한 사회적 계약을 알고도 우리는 계속 이 오멜라스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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