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눌변의 힘

고영직

발행일 2017-06-05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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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김찬호의 '눌변'은 회복력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나를 나이게 하고,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회복력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사회학자로서 성실히 자문자답하려는 사유와 성찰의 여정을 보여주는 칼럼집이다. 지난해 출간되었으나, 대선 이후 사회 전 부문에서 공론영역의 공공성과 더불어 우리 안의 회복력 복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해진 지금·여기에서 읽혀져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이라는 것, 즉 폴리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함을 의미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언명처럼, 리셋 대한민국을 위한 사유와 성찰에 충분히 값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선 이후 우리 사회의 회복력은 말과 설득을 통해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는 동시에, 정상성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김찬호가 말하는 눌언(訥言)의 미덕은 적잖은 신뢰를 준다. 갈수록 나만 옳다는 확언의 수사학이 아니라 판단유보 능력이 요청되는 탈근대적 지성을 위한 방편으로써 눌언의 미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발견한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 안의 과도한 자기애를 극복하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 또한 넘어서자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김찬호의 이러한 신중한 제안은 협력을 위한 의례로서 대화적 대화(dialogic coversation)의 방법을 강조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주장과도 통한다.

대화적 대화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대화"를 말한다. 그런 대화적 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타자에 대한 단정적 태도를 삼가고, 영어의 'as if'처럼 가정법을 사용하자고 세넷이 제안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내가 너라면'이나 '아마 나라면' 같은 식의 어법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눌언의 힘을 강조하는 '눌변' 또한 대화적 대화의 원리에 충실한 책이다.

눌변(訥辯)의 사전적 의미는 "서툴게 더듬거리는 말솜씨"를 뜻한다. 시쳇말로 '고구마'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눌한 말솜씨를 의미하는 눌변을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사안이든 간에 속 시원한 '사이다' 맛을 연상시키는 쾌도난마식 확언의 수사학을 더 선호한다.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을 둘러싸고 고구마 논란이 그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김찬호의 '눌변'은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을 의미하는 대화적 대화와 협력의 의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나는 특히 새로운 '창의한국'을 위해서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적극 모색함으로써 공생의 사회로 가는 율동과 리듬이 창조되리라는 저자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 '눌변'을 통해 말하는 자의 인격뿐만 아니라, 들음에도 인격이 있다는 점을 배웠다.

우리는 좀처럼 현상 너머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성찰하고 사유하고자 한다면 이 책이 좋은 벗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나의 자아와 너의 자아가 만나 유대를 맺는 능력이 중요하고, 서로의 내면을 연결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책이라는 점을 당신도 느끼게 될 것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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