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13]화신그룹-1 사업의 시작과 선광인쇄

처세 달인 '영욕의 격랑' 파도타기

경인일보

발행일 2017-06-06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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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 박흥식, 2천석 부농 둘째
16세때 쌀장사 시작 무역상 성장
18세때 세운 인쇄소 주식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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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재벌문제연구소에서 1985년에 발간한 '재벌25시'에는 화신그룹 창업자에 대해 '영욕의 격랑을 헤쳐온 파도타기의 명수'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화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친 기업인으로서 일제에 발 벗고 충성한 장본인"이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반민특위 해체로 기사회생했다. 언제나 힘이 강한 쪽에 편승하여 재산을 늘린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8월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에서 2천석 지기의 부농 박제현(朴濟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결혼과 함께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수리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16세 때인 1918년에 진남포의 객주와 연결해서 쌀장사를 시작했다.

식민지 백성들로서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임을 각성했던 것이다. 또한 10년 연상인 형 박창식(朴昌植)이 1910년에, 부친은 1916년에 각각 사망함으로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박흥식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성품이 올곧았던 창식은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다니면서 우국충정을 키웠는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한 달 만에 초죽음이 되어 풀려난 후 그해 12월 1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친은 장남을 잃은 후 아픈 마음을 달래려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16년 8월 6일에 39세로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일본에는 식량난이 심각해 1918년 8월에는 급기야 '쌀 소동'이 벌어졌다. 1918년 여름 일본 민중들이 쌀 도매상들의 가격 담합에 집단 항의한 사건인데, 그 여파로 테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이 총사퇴 하기도 했다.

근대 일본이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곡물가격이 급등세를 보여 농산물유통업이 호황이었다. 평남 서해 끝단의 곡창지대인 용강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박흥식은 사업개시 1년 만에 제법 큰 미곡무역상이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시황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등 상리(商理)에 밝았던 것이다.

18세 때인 1920년에는 한국인에게 불모지와 같았던 인쇄와 종이류 판매를 겸하는 자본금 5만원(圓)의 선광인쇄소(鮮光印刷所)를 용강 읍내에 세웠다. 5만원은 요즘 가치로 대략 1억여 원으로 18세 소년사업가에겐 매우 큰 돈이었으나 어머니의 배려로 가능했다.

명함, 청첩장, 부고장 같은 것을 찍기 시작해 점차 군청과 면사무소의 각종 공문을 맡아 찍었으며 진남포와 강서지방의 인쇄물까지 수주할 정도였다.

국내에 근대인쇄업이 최초로 개시된 것은 1881년 부산에서 일본인에 의해 신식의 연활자(鉛活字)가 보급되면서부터였다. 금속활자는 재료에 따라 동(銅)활자, 철(鐵)활자, 연활자 등으로 구분하는데 활자의 재료가 납이면 납활자 혹은 연활자라 칭했다.

1883년에는 정부가 박문국을 설치해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했으며, 1884년에는 사설인쇄업체인 광인사(廣印社)가 배재학당과 기독교단체 등의 출판물을 인쇄했다. 이후부터 점차 인쇄출판 및 인쇄용지 시장규모가 커졌으나 서울 등 대도시에 국한되었을 뿐, 지방 소도시는 여전한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흥식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통신판매제를 도입했다. 먼 지방의 고객들에게 상품목록이나 가격표 등을 표시한 카탈로그를 발송해 주문을 권유하고 우편 등을 이용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187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해 선진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달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업태였다.

박흥식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회사 일에 매달렸다. '화신오십년사'에는 그가 야근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인쇄소는 날로 번창했다.

1924년에는 자본금 10만원(圓)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재발족하는 등 박흥식은 어엿한 청년사업가로 성장해 있었다. 선광인쇄는 박흥식이 시도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업으로 장차 화신그룹 형성의 발판이 되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사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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