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14]화신그룹-2 1926년 문 연 선일지물

'조선에서 제일' 청년의 야심찬 상경

경인일보

발행일 2017-06-13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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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대 제지 신문시장 장악
'스웨덴 용지' 박리다매 성공
금강산 유람등 홍보· 판로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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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청년 사업가로 성장한 박흥식은 궁벽한 시골구석보다 경성(서울)에서 웅지를 펴겠다고 결심하고 2, 3개월에 한 차례씩 서울을 왕래하며 제반 사항들을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 서울이전 계획을 접한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이 박흥식의 서울행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10여 대(代) 동안 뿌리를 내린 고향을 떠나는 것도 문제인데다 연고가 전혀 없는 서울에서 약관의 청년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 때문이었지만, 박흥식의 결심은 꺾지 못했다.

그는 24세 때인 1926년 봄에 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일 서울의 중심지인 황금정(을지로) 2정목 180번지에서 자본금 25만원(圓)의 선일지물(鮮一紙物)주식회사를 차리고 지물 도매 및 부대사업을 시작했다.

상호 '선일'은 '조선에서 제일'이 되겠다는 박흥식의 야심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한달 하숙비가 10원 내외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1920년대는 소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로 불리던 때여서 일제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문화정책을 표방해 신문잡지와 각종 서적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인쇄용지의 수요량이 날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박흥식은 서울에서 뿌리를 내릴 여지가 없었다.

당시 국내의 신문용지 시장은 일본의 3대 제지 메이커인 왕자제지(王子製紙), 북월제지(北越製紙), 화태공업(樺太工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박흥식은 당초 왕자제지로부터 신문용지를 수입하려 했다.

당시 왕자제지, 북월제지, 화태공업은 서로 과당경쟁을 피하기 위해 공동판매기구(카르텔)를 결성한 뒤 그곳에서 지명한 특약점에 한해 지물류를 공급하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국내의 관공서와 일본인 소유 민간기업, 일본계 신문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용지까지 독점 공급해 엄청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일본인 지물상들은 무명의 시골청년이 철옹성을 자랑하는 서울의 지물업계에 뛰어든 것을 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으로 코웃음을 쳤다. 동포 상인들도 혜성처럼 등장한 선일지물에 경이와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박흥식은 공동판매기구와의 접촉에서 실패한 후 1927년 초가을에 일본에 건너가서 새로운 수입처를 물색하다 궁리 끝에 스웨덴을 떠올렸다. 학생 시절에 스웨덴은 전 국토의 59%가 산림지대로 제재, 펄프, 제지업이 발달했다는 점을 교육 받았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스웨덴의 일본대사관을 찾아 상무관과의 면담을 통해 실마리를 풀었다. 반신반의로 추진한 상담은 성공이었다. 상담 후 얼마 안돼 상무관이 약속한 견본(샘플)과 가격표가 도착했는데 용지의 질도 일본산보다 훨씬 좋았을 뿐 아니라 가격 또한 일본산에 비해 파격적으로 저렴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산 신문용지는 1연(連) 당 4원 50전인 반면에 스웨덴산은 2원 42전 5리에 불과했다.

무역선 더글러스호는 스웨덴의 신문용지를 가득 싣고 인천항에 입항했다. 선일지물은 일본제품들보다 재질이 우수하고 가격도 절반인 신문용지를 스웨덴으로부터 직수입해서 연(連)당 3원75전에 박리다매했다.

화지(和紙, 일본 종이)의 경우 중간상을 배제하고 직접 주산지인 일본 인주(因洲), 이예(伊豫), 토좌(土佐) 등지의 생산업체들과 하청계약을 맺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경쟁업체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했다. 이후 선일지물의 사시(社是)는 "싸게 사서 싸게 판다"로 굳어졌다.

또한 특별봉사 판매방식을 채택하여 카본지 500타 이상을 일정 기간 내에 구입하는 고객들에게는 회사부담으로 금강산 유람에 초대하고, 화지(和紙) 50환(丸)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일본관광에 초대하는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국내의 여러 신문사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맞아들였다. 지류 수입선도 캐나다의 바우리 리바 제지회사를 추가했다. 그 결과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신문사에 신문용지를 독점 공급했을 뿐 아니라 멀리 만주와 중국 등지로 판로를 확장했다.

선일지물은 서울 진출 6년만인 1932년에 신문용지, 화지·양지 등의 연간 판매고 300만원(현재가치 약 400억원)을 기록해 국내 제일의 지물회사로 성장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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