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18]화신그룹-6 계열사 정리

전쟁딛고 내실도모 미국식 복합기업화

경인일보

발행일 2017-07-11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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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강점기 경제통제로 축소경영
불황 대비 지물·연쇄점 등 합병
국내 첫 항공기공장 시도 좌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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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박흥식이 1939년 4월 설립한 화신무역이 수출한 품목들은 수산물(통조림, 건어물, 생선기름 등), 광산물(흑연, 형석, 석탄 등), 공산물(방적기계 부품, 공예품, 인견, 마포, 신문용지 등), 농림산물(밤, 콩, 인삼, 돼지털, 베니어판, 코르크 등) 및 양품(洋品) 등이었다.

전국의 연쇄점을 통해 물품을 손쉽게 조달받은 탓에 화신무역은 남방무역을 거의 독점했을 뿐 아니라 천진 일대에서는 동화산업(東華産業)과 경쟁하며 성장했다.

화신무역은 설립 5개월 만에 남아프리카에 양은식기 등을, 미국에는 명태를, 이듬해에는 태국에 운동화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태국 수출을 계기로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태국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피분 수상이 집권하면서 신문화운동 제창과 함께 모든 국민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태국 정부는 특히 전차를 타려면 반드시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만들고 위반자에겐 우리 돈으로 4원(圓) 가량의 벌금을 물렸다. 당시 태국인 1인당 한 달 생활비가 8원 정도였다. 박흥식은 벌금이 두려워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던 태국인들에게 운동화를 수출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 역시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무역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무역상들을 규제하기 위해 수출업을 쿼터제로 전환, 무역창구를 실적순위에 따라 화신무역과 동화산업 양사 체제로 제한함으로써 화신무역은 불황 중에도 호황을 구가했다.

1940년 7월 7일 이른바 '77금지령(禁止令)'을 필두로 일제는 경제통제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수 많은 기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축소경영을 해야했다. 화신그룹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은 공급난으로 부진했다.

1941년 9월에 선일지물과 화신연쇄점(주)를 화신무역에 흡수 합병시켜 자본금을 500만 원으로 늘리는 한편 내실화를 도모했다. 대동흥업은 (주)화신에 흡수 합병해서 자본금 300만 원의 화신상사(和信商事)로 상호를 변경하고 대외무역에 주력했다.

1944년 3월에는 화신상사를 화신산업주식회사로 개명하였고, 같은해 11월에는 이를 (주)화신에 흡수(자본 800만원)하는 등 계열사 축소와 함께 자본규모의 대형화를 도모했다. 이로써 화신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주)화신에 통합됐고, (주)화신은 미국 스타일의 복합기업으로 모양새를 바꿨다.

불황시대에 대비한 계열사 정리를 단행한 후 박흥식은 더 이상의 사업 확장은 도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10월에 그는 당시 유력 기업가들을 규합해서 공동으로 조선비행기공업(朝鮮飛行機工業)을 설립했다. 공칭자본 5천만원(圓)에 본사는 종로2가 5번지에 두었다.

생산공장은 경기도 안양에 건설하기로 하고 초대 이사진으로는 박흥식, 방규환(方奎煥), 방의석(方義錫), 장직상(張稷相), 김연수(金秊洙), 박춘금(朴春琴), 이기연(李基衍), 민규식(閔奎植), 김정호(金正浩) 등 한국인 실업계를 대표하는 간판급 기업인들과 조선총독부, 일본정부 내 항공부, 각 은행 대표, 화신그룹의 계열사 등이 포함됐다.

이 회사는 국내 최초의 민간항공기 제작회사였는데 당시 총독부에서 한국에 민간항공기 제조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미군기들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빈번해졌다. 당시 미군기들의 공습대상은 주로 군수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들이었는데 빈번한 폭격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일본정부는 일본 육군 및 해군의 항공기 제조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서둘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항공기가 설립된 것이다. 이 회사는 1944년 12월에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는 한편 공장건설을 서두르고 자본 확충과 사원확보를 위해 주력하던 중 1945년 해방으로 비행기를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한 체 폐업했다.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던 박흥식의 야망은 이렇게 일본 패망으로 좌절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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