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19]화신그룹-7 최대의 시련

일제 패망후 경영난… 무역업 '돌파구'

경인일보

발행일 2017-07-18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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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구속 대법정서 '무죄'
화신무역 흡수 '화신산업' 변경
6·25전쟁으로 화신백화점 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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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뻐하는 만세 소리가 천하를 진동했다. 박흥식은 당황했으나 곧 기지를 발휘하여 화신백화점의 6층 처마에 'ELCOME ALLIED FORCES!(연합군을 환영합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면죄부를 찾을 궁리를 했다. 그러나 박흥식의 매국행각에 울분을 참아왔던 애국지사들과 좌익 청년들은 화신백화점 쇼윈도와 벽에 극렬한 벽보를 붙였다.

'노동자의 착취자 박흥식을 처단하라' '반민족자요 전범인 박흥식을 인민의 이름으로 단죄한다'

청년들은 중역들을 감금하고 사장실로 몰려가 박흥식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며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일단의 청년들과 농민들은 원한의 상징이었던 군수산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안양공장을 습격했다. 그들은 당시 값으로 6억원(圓)에 달하는 기계시설과 자재들을 부수고 그 일부를 뜯어갔다. ('재벌 25시' 기록 인용)

1946년 2월에는 박흥식과 그의 조카 박병교(朴炳敎) 전무가 화신백화점의 매점매석과 조선비행기(주)의 경리부정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56차례의 공판을 거쳐 76일 만에 무죄 석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화신무역이 돌파구를 찾았다. 패망한 일본과의 교역이 난관에 봉착하자 마카오, 홍콩, 천진, 청도 등과의 무역에 주목한 것이다. 화신무역은 1948년에 조선우선(朝鮮郵船, 대한해운공사)로부터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을 빌려 홍콩으로 해산물과 홍삼 등을 수출했다.

조선우선은 1912년에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아 자본금 300만원(圓)으로 설립된 반관반민의 특수회사였다. 국내 연안항로를 거의 독점했으나, 해방직후인 1949년에 교통부산하의 대한해운공사로 재발족했다. 1968년에 민영화되어 1980년에 대한선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한진해운에 합병되었다.

화신을 선두로 삼흥실업, 동아상사, 대한산업, 대한물산, 삼호무역, 천우사 등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무역업이 점차 활성화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앵도환이 북한에 억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북한측이 남한에 전기공급을 중단했다.

한국정부는 맞대응 대신 북한측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 물자교환을 추진해 화신무역의 앵도환이 물자를 싣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출발했다. 앵도환이 원산항에 정박 중이던 1948년 9월 12일에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박흥식의 체포를 계기로 북한이 앵도환을 억류하였는데, 이유는 "박흥식은 친일파로 처단 받게 되었으니 이 같은 반동분자의 재산은 인민의 이름으로 압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에 의해 제1호로 구속된 인사였다. 죄목은 반민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에 해당됐는데, 10년 이상의 징역 혹은 15년 이하의 공민권 정지 및 재산 압수를 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박흥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 103일 만인 4월 21일에 100만 원(圓)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가치로는 대략 1천700만 원에 해당한다. 약 5개월 후인 1949년 9월 26일, 대법정에서 박흥식은 끝내 무죄판결을 받았다.

반민법의 족쇄에서 벗어난 박흥식은 화신그룹의 분위기 반전차원에서 1950년 1월 1일을 기해 화신무역을 (주)화신에 흡수시켜 화신산업(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5개월 뒤에 발발한 6.25전쟁은 화신에 또 다른 시련으로 작용했다.

유엔군의 9.28서울수복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퇴각하면서 화신백화점에 불을 질러 전소되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3개월 동안 당시 시가 1억2천여만 원(圓)의 백화점 재고상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박흥식은 북한군의 서울점령 직전인 6월 27일에 인천에서 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 겨우 화를 면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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