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1]화신그룹-9 화신, 역사속으로

계열사 줄부도 60여년만에 그룹 해체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01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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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한화섬 경영난 소유권 넘겨
1차 석유파동 치명타 한계상황
구제금융 좌절 회생노력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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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1962년 5월 15일에 자본금 30억 환의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경기도 남양주 도농에 16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했다.

박흥식은 미국 아메리칸 트레이딩(American Trading Co.) 등을 차관선으로 외자 1천60만 달러와 내자 40억 원을 들여 일산 15t 규모의 비스코스 인견사공장, 일산 20t 규모의 황산공장, 일산 3.6t 규모의 가성소다공장, 일산 6t 규모의 이산화탄소공장 건설작업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서 인견사 시설규모를 20만t에서 15만 t으로 축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20t 규모의 신(新) 시설 도입가격이 미국에서는 1천750만 달러, 이태리에서 2천750만 달러인 반면에 일본 동양레이온에서 몇 년 동안 사용했던 15만t 시설의 경우는 550만 달러에 도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능에서 신품에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수명도 10년간은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공장건설에 필요한 내자 8억4천만 원 중 3억 원은 자신이 조달하고 나머지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용자 받아 해결하기로 했다. 정부는 1962년 6월 10일에 화폐개혁을 단행에서 화폐단위를 종래의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교환비율은 10:1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안정계획 때문에 산업은행 융자가 여의치 못해 건설초기부터 자금난을 겪었다. 당초 10t 규모의 비스코스인견사공장이 설계과정에서 15t으로 늘어난 것도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내자조달이 원활치 못한 상황에서 건설공사가 지지부진하던 1964년 2월부터 차관선으로부터 원리금상환을 독촉 받기 시작하였다.

박흥식은 신신백화점 부근의 금싸라기 땅과 화신산업의 건물을 처분해서 1966년 12월 15일에 외자 1천50만 달러, 내자 40여억 원을 들여 동양최대의 공장을 완공했다. 이날 기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등이 참석하여 2천여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후부터 흥한화섬은 본격가동에 돌입하였으나 인견사의 내수 및 수출이 의도한 대로 확대되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1968년 10월 15일에 박흥식은 흥한화섬 주식 50.003%를 산업은행에 넘겼으며 1969년 10월 15일에는 화신산업과 박흥식이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주식(29만9천730주)까지 산업은행에 넘겨 흥한화섬의 소유권은 산업은행으로 이전됐다.

흥한화섬의 설립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힘을 소진했던 화신산업은 1971년 5월 21일에 본사를 종로2가 YMCA빌딩에서 중구 초동의 자동차보험빌딩으로 이전한 후 그룹회생에 매진해서 1972년 3월 14일에 화신전기를 설립했다.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2만여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하고 총 15억 원을 투입해 1974년 9월 15일에 완공했다. 이 회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지도를 받아 냉방기생산에 착수했다.

1973년 11월 13일에는 화신산업과 일본 (주)레나운, (주)쿠라레 등과 60:30:10의 비율로 합자하여 자본금 10억 원의 화신레나운을 설립했다. 니트 셔츠, 신사복 상의 등 봉제품 가공 및 판매를 위해서였는데 본사는 인천시 남구 학익동 430번지에 뒀다.

또한 1973년 9월 1일에는 일본 소니와 51:49의 비율로 합자해서 자본금 10억원의 화신쏘니를 설립했다.

당시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이 일본의 하다치, 도시바, NEC등과 합자하여 국내 가전시장을 분할지배하고 있었다. 기존의 가전업체들이 긴장한 가운데 화신쏘니는 1974년 5월에 부천시 도당동에 제1 공장을 준공하고 제품생산에 착수했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으로 화신쏘니 등은 시작부터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하였다. 화신쏘니의 경영이 초반부터 경영난에 직면하자 일본측 파트너인 소니사가 화신쏘니의 자본을 회수했다.

화신그룹의 경영이 한계상황에 직면, 박흥식은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이 1980년 10월 23일에 화신그룹 계열사들을 최종부도 처리했다. 당시 화신산업, 화신전자, 화신전기 등 3사의 부채는 323억 원이었다.

박흥식은 화신레나운, 화신타이거리싱 등을 매각하여 60억 원을 상환하고 신신백화점을 제일은행에 매각하는 등 화신그룹 사수를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기업역사상 최초의 재벌이자 60여년 역사의 화신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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