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현재 진행형' 분단 트라우마

고영직

발행일 2017-08-14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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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지방의 한 읍에서 읍 승격 20주년을 맞아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읍지(邑誌)를 발간하고자 한다. 발간 전체를 통괄하는 편찬위원회가 결성되고, 실무를 책임지는 편집위원회가 꾸려진다. 역사학 전공 교수진에게 분야별로 원고를 의뢰했고, 완성된 원고에 대한 편찬위원회의 윤독회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사단이 난 것은 작중 어느 교수가 읍의 근현대사에 대해 쓴 '해방정국과 6·25전쟁'편이다. 이른바 '좌빨' 시비가 빚어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병산읍'에서 전쟁 당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보련) 사건에 관한 서술 때문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좌익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읍에서는 700여명 전후로 추산되는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그런데 더 많은 보련 희생자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면장 김후곤이 허형도 지서장을 찾아 구금 중인 보련원들을 풀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허 지서장이 이에 응해 90여명의 보련원들을 풀어준다. 그 사건 이후 보련원들을 처리하라는 본서의 명령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고, 민간인들에 대한 재판과정 없는 불법 학살은 중단된다.

원로작가 조갑상의 소설집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위와 같은 문제설정을 통해 계속되는 분단 트라우마를 성찰하려는 만만치 않은 작가의 내공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fact)을 어떻게 서술하고 편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분단 트라우마가 지금·여기 살아 있는 뜨거운 쟁점이라는 점을 하나의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과거사를 둘러싼 기억투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보도연맹 사건이 6·25의 전부가 아니다, 좌빨 글 싣는 데 한 푼도 예산 쓸 수 없다…, 같은 언사들이 작중 인물에게 가해진다. "요즘 이런 저술들의 추세가 그 고장의 변화 발자취를 통해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를 알리는 것 아닙니까."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해방 이후 역사 서술과 편집에 있어서 오직 하나뿐인 공식 이데올로기는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라는 사관(史觀)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강력히 짓눌러왔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관제(官製) 기억인 국정화 역사교과서를 도입하고자 한 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그 좋은 예가 된다. 이 점에서 조갑상이 소설에서 빚어낸 병산읍은 분단 트라우마로부터 아직도 자유롭지도 못하고, 자유로울 수도 없는 분단 한반도를 환유한다. 조갑상은 독자들에게 국민보도연맹 같은 분단 시대 비극의 역사에 대한 의미화란 결국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결코 간단치 않은 화두를 제시한다.

작가는 1980년 데뷔 이후 줄곧 보도연맹 문제에 천착해오다 문제작 '밤의 눈'(2012)을 발표했다. 그는 '밤의 눈'에서 분단 트라우마의 실상이란 길들여진 공포가 작동해온 시절이었음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사회적 생매장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 형상들은 21세기 분단문학의 소중한 결실이다. 그는 분단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은 역사적 사실은 사실로 수용하되 역사적 사실을 넘어 문학적 진실을 중단 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해후'의 마지막 문장을 아프게 읽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증산이 장인만이 묻힌 땅은 아니었다. 산소조차 쓰지 못한 죽음들도 새겨야 했다." 8·15, 72번째 광복절이 오고 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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