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3]태창그룹-1 육의전 상인 출신

대대로 시전 포목상… 대창무역 시초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15 제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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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수, 1916년 가족회사 '첫발'
1924년 대창직물 기업체 재발족
장남사후 막내 낙승 경영권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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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태창그룹의 역사는 19세기 말의 백윤수상점(白潤洙商店)으로부터 출발했다. 본관이 수원인 백윤수(1855~1921)는 조선 말기 이래 서울 종로에서 대대로 포목상을 경영해온 시전상인으로, 청나라에서 수입한 견직물을 판매했다.

조선 면포 업계의 원조로 불리던 그는 1916년 5월 4일 경성부 공평동 87번지에서 자본금 50만원(圓)의 대창무역(주)를 설립했다. 대창무역은 당시 조선인들이 소유·경영하는 무역업체들 중에서 자본금 규모가 가장 컸으나 백윤수와 아들들이 경영하는 전형적인 가족 회사였다.

대창무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따른 전시(戰時) 호황에 힘입어 1919년까지 매년 평균 30%의 고율 배당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등이 설립한 공익사(共益社)와 함께 13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전시이득세(戰時利得稅)를 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백윤수가 상업자본가에서 산업자본가로 전환한 배경이었는데, 1920년에는 대창무역 내에 직물가공부를 두고 생산을 개시하는 등 제조업으로 지평을 넓혔다.

1924년 9월에는 경성부 냉동(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7번지에 견직물 제조를 목적으로 자본금 25만원의 대창직물(주)를 설립했다. 백윤수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한 장남 백낙원이 대창무역의 직물제조부문을 분리해서 별도의 기업체로 재발족한 것이다.

백윤수는 슬하에 낙원, 낙중, 낙삼, 낙승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인 백낙승(白樂承)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의 부친이다. 백낙승은 일본 명치대 법학과와 일본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에 가업인 대창무역의 취체역으로 입사했다.

그는 1935년에 삼화(三和)제약(주)를 설립했으며 1930년대 말에는 큰형 낙원의 사망으로 대창직물의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 무렵 대창은 조선인 실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함은 물론 점차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준비를 완료했다.

백낙승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에 방직업체인 대전흥아(大田興亞)직포공장을 설립하고 강원조선철공(주)의 사장에 취임했다. 1942년 6월에는 일본인 소유의 특수회사인 조선도변주공(朝鮮渡邊鑄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해 경영권까지 장악했다. 특수회사란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한 특수 목적을 수행하는 독과점기업이다.

조선도변주공은 고철상을 경영하던 일본인 야마타(山田勘一)가 일본 내 철강 기근에 따른 고철수집 붐에 편승해서 1938년 2월에 설립한 재생 선철(銑鐵)업체인 고양주공소(高揚鑄工所)가 모체다.

1939년 11월 고양주공소는 일본 요코하마의 중견철공소인 와타나베주조(渡邊鑄造)주식회사와 합쳐 조선도변주공(주)로 재발족했다. 1940년 1월 경성부 고양군 독도(현재의 뚝섬)에 경성공장을 설치하고 양은·고철 등을 재생산해 일본에 수출하기로 했는데, 5개월 후 조선총독부가 재생 선철업 정리명령을 발하면서 생산을 중단했다.

그 대신 총독부는 조선도변주공을 무연탄제철 시험조업 공장으로 지정했는데, 1941년 8월에 무연탄을 연료로 선철(銑鐵)을 생산하는 시험조업에 성공해 일본 군부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는 철광석은 물론 무연탄 매장량이 풍부해 무연탄을 에너지원으로 제선(製銑)이 가능하다면 일본군 전쟁 수행에 엄청난 순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문제였다. 무연탄 선철의 생산원가가 톤당 190원인데다 감가상각비와 영업이익까지 포함하면 톤당 230원으로 당시 선철 가격 보다 2배 이상이었다.

장기간의 무연탄제철 실험조업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음에도 와타나베 사장은 적자를 자비로 충당하면서까지 운영을 계속했는데 1942년 6월에 백낙승이 사장에 취임했다. 자금부족으로 백낙승의 융자에 의존하다 경영권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 8월 당시 경성공장은 소형용광로 10톤과 15톤 용광로 각 1기씩에다 주물공장 250평, 확장 중인 주물공장 652평, 부속건물 2천평, 부지 6천평에 공원 수가 150명에 이르는 등 총자산이 147만7천원이었다.

1942년 10월에는 일본정부가 기획한 소형용광로 제철계획 담당업체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소형용광로제철의 조선지역 사업권까지 획득했다. 1943년 2월에는 일본무연탄제철(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자본금을 19만5천원에서 13배 이상인 259만7천500원으로 증자했다.

백낙승은 발행주식 10만주 중 3만9천주를 확보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일본무연탄제철은 조선의 주요 국책회사로 탈바꿈했으며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주)와 함께 제1차 조선군수회사로 지정됐다. 그는 박흥식, 김연수, 방의석 등과 함께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하고 경영에 참여했으며 항공기를 비롯한 거액의 국방비를 헌납하기도 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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