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4]태창그룹-2 학습효과가 만든 태창재벌

대자산가 도약 수단 된 '정경유착'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22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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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층 접근 부 축적 '친일기업'
조선총독부, 자본·리스크 뒷배
해방후 이승만 줄대 치부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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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1943년 당시 백낙승 명의의 재산은 경기도 고양군을 비롯한 전국에 부동산 112만4천원과 만주직물공장을 비롯한 투자자금 480만원, 일본무연탄과 제철은행을 비롯한 대부금 160만원, 예금과 현금 30만원 등 총자산이 1천141만4천원에 달했다.

부채는 한성은행 차입금 124만원에 불과해, 순자산은 1천17만4천원으로 국내 굴지의 대자산가로 성장했다.(고승제 '한국경영사연구', 한국능률협회, 1973)

일본무연탄제철(주)가 일등공신이었다. 일본무연탄제철 경성공장의 자산가치는 1944년 10월말 현재 266만3천621원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에 경성공장 증설용 자금 350만원 융자건을 승인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해방직후 경성공장의 실제 자산가치는 고정자산 266만여원과 증설자금 350만원에 유동자산 등을 합쳐 800만여 원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태평양전쟁(1941~1945) 동안 일본무연탄제철은 자본조달은 물론 경영 리스크까지 총독부가 전부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백낙승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의 군수 비즈니스였다.

백낙승이 아무리 조선굴지의 자본가 후예라고는 하나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가업가가 일본 군국주의의 이해와 밀접한 국책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없이는 언감생심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백낙승은 대표적인 친일기업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경유착형 비즈니스 경험은 해방 이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애국(정경유착)하면 흥할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마인드였다. (정안기, '해방 전후 백낙승의 기업가활동과 일본무연탄제철(주)-고창김씨가의 기업가활동과 비교시점에서-', 2010)

한편, 태평양전쟁 말기에 태창직물은 만주지역에 대한 직물 수출을 독점하고 있었다. 1935년 4월 20일에 설립된 태창직물은 1941년 당시에는 경성부 휘경정(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189번지에 본사를 두고 직물의 제조 및 판매업을 영위했는데 공칭자본 100만원에 75만원을 불입한 상태로 백낙승이 취체역 사장이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에 접근하여 이들의 비호 하에서 직물수출 독점권을 확보했다.

태창직물은 자사 제품은 물론 일본의 마루베니(丸紅), 이토추(伊藤忠)상사 등의 제품을 수입, 만주에 공급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였다. 일본의 메이커들이 태창직물에 포목을 공급하면 태창직물에서는 이 포목에 태창의 상표(벚꽃 속에 태(泰)자를 써넣은 것)를 찍어 재수출 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태창직물은 관동군사령부의 비호 하에서 포목 밀수출도 병행했다. 태창에서 만주에 수송하는 화물차량을 관동군 헌병들이 호송하는 방법으로 세관의 검문을 피했던 것이다.

당시 백낙승은 포목 밀수 등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일본 최대 동양면화(東洋棉花)의 주식을 절반 가량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밀수행위는 1945년 종전(終戰) 몇 달 전 당국에 적발돼 밀수품이 법원에 압류되기도 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 한국일보사, 1982)

당시 태창의 상표가 찍힌 포목이 서울역 앞 광장에 있던 조일창고(朝日倉庫) 3개 동에 가득 쌓인 채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재판 진행 중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법원에 의하여 압류되었던 포목들은 미군정 법무관의 해제 명령으로 전부 태창에 인계됐다.

물자가 크게 부족했던 시절 태창은 이 포목들을 처분하여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또한 백낙승은 '정크무역'에 참여해서 대무역상으로 부상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과의 경제거래가 경색된 틈을 이용해 중국의 수많은 소형 상선(정크선)들이 각종 물건을 싣고 국내로 들어와 우리 상인들과 직거래했던 것이다.

일제하에서 권력층에 접근하여 부를 축적했던 백낙승은 해방 후에도 이러한 방식에 의한 치부를 모색했다.

광산경영으로 떼돈을 벌었던 최창학(崔昌學)은 김구(金九)와, 경성방직은 한민당의 송진우와, 대동광업(大同鑛業)의 이종만(李鎭萬)은 여운형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박흥식, 방의석(方義錫) 등도 각각 정치권의 실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7년 8월경 정치자금 확보에 곤란을 겪던 이승만에게 백낙승은 70만원(圓)의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그 후에도 생활비로 매달 50만원씩 바쳤다.(이종재 '재벌이력서', 한국일보, 1993)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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