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공]놀면서 배우는 창의융합교실-'과학의 생활화!' 과학자 김용관 선생

'발명 대중화' 또다른 독립투쟁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22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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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기술' 중요성 눈떠
학회·전문지 창간등 '과학강국 조선' 힘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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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5인의 독립운동가를 호명했다.

의열단원으로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 이태준 선생, 간도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선생,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독립군 결사대 단원이었던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과학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과학자 김용관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5인의 독립운동가 중 김용관 선생은 대한민국 최초로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 과학발명 대중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던 과학자였으며 '과학'과 '발명'이란 무기로 또 다른 '독립투쟁'을 했던 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과학기술 교육을 철저하게 통제해 조선인 고급 과학기술자가 배출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조선인 의사, 변호사는 있었으나 조선인 과학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04년 일제가 통감부를 개설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우민화(愚民化)와 점진적인 동화(同化)정책을 목표로 삼아 대한제국의 6년제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보통학교령'을 공포해 수업을 4년으로 단축, 우리나라 학생들을 자신들에게 복종하도록 교육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제국이 설립한 '관립 상공학교'를 단순한 기능만을 익히도록 교육하는 '공업전습소'로 격하하기도 했다. 또한 총독부는 1938년 이전까지 대학에 이공계 학과를 두지 못하도록 했으며 관련학과로의 유학도 어렵도록 헸다.

김용관 선생은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 조선총독부 장학생에 선발돼 동경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에서 요업(비금속광물을 이용한 화학공업의 한부분)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중 일본의 빠른 성장이 발명과학의 대중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1924년 경성공업전문학교 동기였던 현득영, 박길룡 등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발명학회'를 설립해 발명과학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다.

다양한 신문과 잡지를 통해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연재하고 1933년 6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발명 전문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기도 했다.

또 1934년 2월 28일에는 김용관 선생의 주도로 31명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1809~1882)의 서거일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다. 과학대중화를 위해서는 과학데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한 것이다.

제1회 과학데이를 맞이해 김용관 선생은 라디오에 출연해 과학지식 보급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대중과학강연, 과학관, 영등포방직공장, 중앙시험소, 중앙전화국 등의 단체견학, 과학활동사진 상영 등의 행사도 진행했다.

이듬해 제2회 과학데이는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차와 군악대가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과학의 노래'를 연주하는 등 규모가 더욱 커져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 '다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분기하자!'는 그의 구호는 잠시나마 꽃을 피우는 듯 했으나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돼 과학행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과학으로 우리 민족을 굳건히 세우려 했던 김용관 선생. 암으로 196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돼야 할 것이다.

/안달 효덕초 교사

※위 창의융합교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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