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5]태창그룹(완)-3 과유불급

도넘은 권력과 밀월, 결국 허망한 말로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29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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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헐값불하·홍삼 독점판매등
이승만 비호에 국내 최초 재벌로
4·19이후 군사정부 환수로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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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백사장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이 좋아하는 약밥을 해가지고 들어와 경무대에서 오찬을 접대 받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은 그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백사장, 그동안 도와주어 고마워. 내가 돈이 있으면 갚아야겠으나 나에게 먹고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국가일 하라고 준 것이니 고맙게 받겠어. 백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어."

백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 후에 달러라면 그렇게도 벌벌 떨던 이 대통령이 일본 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확장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이 인연 때문이었다. (윤석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경무대4계 2', 중앙일보사, 1973)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은 74세 고령으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에 입주했다. 윤석오는 191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1931년부터 중국의 상해(上海) 등지에서 유학하다 귀국해 해방 후 정부수립 때까지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근무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국내 최대의 면방직공장이던 고려방직 영등포공장을 백낙승이 헐값에 불하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공장의 모체는 일본 굴지의 방적업체인 종연(鍾淵)공업주식회사가 1935년 7월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00에 세운 경성공장이다.

방기 4만9천720추, 직기 1천525대를 갖추고 1936년 10월부터 조업에 착수했는데 1945년 10월에 미 군정에 귀속재산으로 접수되어 조선실업공사 서울공장으로 운영되다 1947년 7월에 광주, 전주, 춘천, 대전, 영등포 등 5개 공장을 묶어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후에 방림방적이 됨)으로 전환했다.

백낙승은 해방 직후에 친일기업인으로 지목되어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내 석방됐다. 이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비호 때문으로 추정된다.

1953년 5월에 태창방직은 정부 보유불 500만 달러를 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일본에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해서 시설을 확장했다. 1955년에는 고려방직을 임대경영 하기로 정부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1956년 1월에는 고려방직을 1억7천만환에 불하받았다.

정부는 국가전매사업의 하나인 홍삼판매독점권을 태창그룹 계열사인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에 넘겼으며 귀속재산인 (주)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 관리권까지 백낙승에 제공했다.

1937년 6월 4일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인천 만석동 일대의 갯벌을 매립해 세운 대규모 공장이었는데 1941년 당시 자본금 600만원(375만원 불입)에 5천여 명이 근무했다.

설립 초기에는 민수용 광산기계에서 육군 포탄강(砲彈鋼)과 시추기, 해군용 선박엔진 등을 생산하다 1943년에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잠수함 건조 명령을 받아 조선소로 전환했다.

태창방직은 1950년 현재 태창공업, 태창직물, 태창무역, 해전직물(海田織物), 대한문화선전사, 조선기계 등의 계열기업군을 거느림으로써 '국내최초의 재벌'이라 불렸다. 재벌이란 기업가들이 뇌물수수를 전제로 권력층 혹은 관료 등과 유착해서 독과점이윤 확보 내지 재정금융상의 혜택을 누리는 정상배(政商輩)들을 지칭했다. 백낙승은 전형적인 정경유착형 기업가였다.

"백낙승은 정치적인 바람을 너무나 거세게 일으켰다. 6·25전쟁 이후 파괴된 공장을 복구할 때 지나친 특혜가 말썽이 되었고, 그 후에도 삼백파동, 연계자금사건 등 말썽이 있을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다"(박병윤 '재벌과 정치')

1956년에 백낙승이 사망하면서 태창그룹의 경영권은 장남인 백남일에 넘겨졌으나 이후 경영난으로 고전하다 1961년 4·19혁명 이후에 태창재벌은 파산했다. 1950년대 후반 경제불황에 따른 내수위축에다 신제품인 합성섬유의 등장으로 기존의 자연섬유 업계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정국은 설상가상이었을 것이다.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 12억여 원의 환수액을 통고받자 백씨 일가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일본으로 귀화했다. 부정축재조사단이 결정한 국고 환수액은 125억4천771만5천133환으로 백남일 보유자산의 7배에 달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이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태창그룹은 출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정부와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창업자 백윤수는 조선조의 어용상인인 시전(市廛)상인으로 창업의 터전을 닦았고, 2세 경영인 백낙승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 기업가로서 일제하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와 밀월 관계를 통해 치부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정부에 유착해 초과이윤을 누렸다.

시장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경제적 이권이 권력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정경유착을 통한 이윤추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태창의 경우는 국민들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전형적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사례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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