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5]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下)

풍요로운 소금밭과 평야에서 자란 '목수의 아들'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7-09-07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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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전매국 염전 목수였던 아버지
물 끌어올리던 수차도 만들어
창고부터 제염도구까지 '뚝딱'
생활력 좋은 모친은 약방 운영
약사자격 없어 제조 아닌 판매

1948년 연안중학교로 진학…
당시 영어담당 박상준 교사 등
학교 출신 유격대서 많이 활약
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았던 곳
인심 넉넉한 고향 가끔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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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염전에서 제염 도구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고향 생각을 하면 넓은 소금밭과 평야, 항상 넉넉했던 마을의 인심이 떠오른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소속 염전 목수로 일했다.

목수는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가업이라고 했다. 전매국은 일제강점기 소금과 담배, 인삼류의 전매 사무를 담당한 곳이다. 일제는 생산성이 낮은 우리 전통방식인 자염(煮鹽) 대신 천일염(天日鹽)을 통해 소금 생산성을 높이려고 했다. 소금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관영으로 염전을 운영했고 소금의 유통까지 담당했다.

우리나라 천일염은 1907년 주안염전이 처음이었고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연백에는 1939년 염전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건너간 1943년 연백염전의 규모는 1천250정보(町步)였다.

염전에 무슨 목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당시 천일염전에서는 목수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소금생산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도구를 만들려면 목수가 꼭 필요했다.

할아버지는 부친이 수차를 만들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서 움직이는 수차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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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연백 염전에서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수차는 염전에 물을 대는 기구다. 1차 증발 과정을 거친 함수가 저장된 '해주'에서 소금결정지로 물을 끌어올릴 때 쓴다. 물레방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수차를 '무자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물을 자아 올린다고 해 이름 붙였다고 한다.

박호석이 쓴 '한국의 농기구'를 보면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물자새',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는 '자애'라고도 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무자위는 지름이 180㎝ 되는 나무 바퀴에 판자로 된 날개 19장을 바퀴 주위에 경사지게 배치했다.

무자위의 아랫부분을 물에 잠기게 설치하고 한 사람이 올라서서 비스듬히 세운 기둥을 잡고 날개를 밟아 내리면, 사람의 무게에 의해 바퀴가 돌고, 바퀴의 날개는 물을 쳐서 밀어 올린다. 올려진 물은 판자로 만든 물길(홈통)을 따라 흘러나온다. 무자위가 끌어올릴 수 있는 물은 1시간에 50~60t정도였다고 한다.

무자위가 있기 전에는 2명이 1조가 돼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렸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시인'으로 유명한 박형진은 그의 책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에서 두레박과 무자위를 함께 소개하면서 "소 같은 사람도 맞두레질을 한 날은 저녁 밥숟갈 놓자마자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져서 잘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인천 출신 시인 유종인이 쓴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에도 수차 얘기가 나온다. 그는 수차를 '염전의 두레박'으로 요즘의 펌프 구실을 했다고 소개한다. 수차를 밟는 염부의 모습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두레박질보다 쉽다 한들 뙤약볕 아래 허벅지가 터질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차를 돌리는 염부도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모습은 시인 김중석이 '수차'라는 시에서 형상화 했다.

"아무리 내딛고 올려 밟아도 제자리이지만//평생 그 걸음으로//수차를 밟는 염부//등을 뚫고 소금이 맺힐 때까지//염전은 자기 살을 태운다//아픈 시늉도 없이//수차 또한 삐걱이며 돌고 또 돌고 돌아//전라(全裸)인 바닷물이 여름 내내 땡볕에 피말려 소금을 만들어내는//아, 쓰라림의 환희//번쩍이는 건 발밑에 있다//놀라워라, 있다//죽을 때까지 그 걸음으로 내딛는 염부와//고통의 제자리거름 밑에서 아픈//시늉도 없이 돌고 도는 수차 밑에//땡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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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무자위는 198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전력이나 엔진을 사용한 양수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수차를 보기 어렵지만, 인천의 소래생태공원에 있는 염전에서는 여전히 전통식 수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계를 사용하면서 전력에 의한 감전사고가 종종 발생하거나 기름이 새기도 했다. 이리 되면 그 소금의 질은 보나 마나다. 인간이 손발을 써 정성을 다하는 데에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담기게 마련이다.

염전에서 목수가 만들어야 하는 제염 도구는 소금 결정지에서 천일염을 모으는 채염 장비가 있다. 이중 고무래는 목재로 된 넉가래에 타이어를 덧대 만든 도구다. 결정지 바닥에 밀착시켜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다 보면 소금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오른다. 큰 것을 대파, 작은 것을 소파라고 했다.

소금을 운반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목수의 몫이었다. 장대 양옆에 바구니가 달린 운반도구 강고(목도)는 외발수레로 발전했고, 지금은 레일카를 이용해 손쉽게 운반한다고 한다. 소금창고를 만드는 큰 작업부터 손 도구를 만드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염전에는 목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전쟁 때는 인천 숭의동의 영국군 부대에서 목수로 일했고 인천에 정착한 뒤에도 신포시장에서 목수 일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다재다능했다.

처음에는 소달구지에 이동식 방앗간을 달아 이집저집 끌고 다니며 쌀을 빻아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과 함께 집 한 켠에서 약방을 운영했다. 정식 약사가 아니라서 약을 제조하지는 않았지만, '제중약방(製衆藥房)'이란 간판을 내걸고 약을 팔았다. 집이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근처여서 장사도 그럭저럭 잘됐다.

2006년에 나온 '경기도약사회 50년사'를 보면 한약방이 중심이었던 우리나라 약업계에 서양 의약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부터다. 일본인들은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에 약방을 세우고 약업계를 장악했다. 초기에는 비누, 치약으로 시작했지만 약품과 화학물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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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지금의 약사라고 할 수 있는 약제사가 처음 등장한 때는 일본인 유미스리(弓削龍藏)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부산 제생의원에 근무하기 위해 들어온 1885년이다. 그는 일본 약제사면허증 2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10년까지 50여 명의 일본인 약제사가 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약국을 개설한 사람은 일본에서 약제사 자격증을 따 1910년 서울 종로3가에 인수당 약국을 세운 유세환이다.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인 이정재가 1913년 종로 낙원동에 삼우당약국을 세웠고, 그 뒤로 약국이 줄줄이 늘었다.

할아버지네 '제중약방'은 약사 자격이 없어 소분과 제조를 하지는 못하고 '매약(賣藥)'만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자격시험이 존재했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격을 얻어 약방을 운영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도 소화제는 활명수가 있었고, 머리 아플 때는 아스피린, 만병통치약은 다이아찡이었어요. 피란 때 어머니가 약을 많이 챙겨왔는데, 돈이 궁하면 약을 조금씩 팔아다가 살림에 보태서 썼어요."

지금도 '부채표'로 유명한 동화제약의 활명수는 1897년 9월 서울에 세워진 동화약방이 만든 소화제다.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만든 약으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이라는 뜻이다.

'한국기업 성장 100년사'를 보면 "계피 4그램, 정향 3그램, 감복숭아씨 6그램을 침출기에 넣고 적포도주 150그램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간 침출시킨 뒤, 이 침출액에 다시 박하니 0.15그램, 장뇌 0.03그램을 넣고 백설탕 40그램과 증류수 70그램을 가한 후 잘 혼합해 용해한 후에 여과시켜 60밀리리터 작은 병에 담는다"고 활명수 제조법이 나온다.

활명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유명하다는 약방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1910년 '부채표'를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했다.

이밖에 해방 직후 미군이 상비약으로 가지고 들어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에 잘 드는 약이었는데 변변한 약이 없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서양 약을 처음 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없던 때라 뭐든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해성면 해남리에 있는 해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연안읍에 있는 연안중학교로 진학했다. 해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연백 내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부모님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연안중학교는 해방 이후 부족한 교육시설을 늘리는 방침에 따라 1946년 5월 개교한 신설학교였다. 전쟁 후 학생들과 함께 반공유격대를 꾸려 북한에 대항했다가 미 8240부대에 편입된 강화 교동 울팩부대를 지휘한 박상준 여단장이 바로 연안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다.

박상준 여단장은 휴전 이후 비정규군이었던 8240부대원들을 흡수한 육군 8250부대 제2연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고 195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내가 전쟁 때 있었던 8240부대에 연안중학교 영어를 가르쳤던 박상준 선생님도 있었어요. 나는 그분이 선생님이니까 아는데 그분은 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죠. 그래도 연안중학교 출신들이 전쟁 때 유격대로 많이 활약했어요."

김은중 할아버지는 태어난 곳은 강화이지만 연백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북5도민회 강화군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연백은 먹을 게 풍족해서 동네에 거지가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추수 후에 남은 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때는 찹쌀떡을 만들어도 팔뚝 만하게 만들어 먹고 부족함이 없었죠.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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