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7]삼호방직-2 본격적인 도약

무명 영세기업, 전국 굴지 대기업으로

경인일보

발행일 2017-09-12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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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삼호방직 공장 전경과 사장 정재호. /'방협20년지' 수록

해방 후 면직물 국내수요 급증
공업사·무역 설립 사업 다각화
6·25때 대구 위치 덕 전시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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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지방의 영세기업에 불과했던 삼호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다. 해방과 함께 면직물의 국내수요가 급증한 덕택이었다. 의식주를 철저히 통제한 일제말 전시(戰時) 통제경제에서 풀려난 데다 해외 동포들의 국내 귀환 숫자가 대폭 증가했으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해방에 따른 혼란과 기술 및 원료부족, 북한의 단전(斷電)에 따른 에너지난 등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차질을 빚는 등 공급애로 때문에 면직공업은 당시 제조업 중에서 가장 호황업종이었다.

1947년부터는 미국산 원면이 본격적으로 수입됐고 서울 당인리와 부산 화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전력난 해소 등에 힘입어 1949년 후반부터는 면직물 생산이 호조를 보였다. 설비도 1945년의 25만3천848추에서 1950년 5월에는 31만6천572추로 증가했고, 직기수도 해방이전 수준인 9천75대로 늘었다.

해방 직전 일본의 제조 대기업들이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값나가는 기계들을 앞다퉈 한국으로 이전했는데,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서 이들을 전부 귀속재산화 했다가 각 공장에 재할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정재호의 기업가 활동도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이 1948년 9월 자본금 1억원(圓·현재 가치 16억여원)의 금성방직(주)를 설립할 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재호는 김성곤과 같은 경북 출신에다 나이도 동갑일 뿐 아니라 나란히 대구에서 사업활동을 영위해온 터에 김성곤이 새로 방직업에 진출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의 조력이 필요했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재호는 1946년에 철공장과 제재공장을 병설해 삼호공업사로 재발족함은 물론 그해에 삼호무역(주)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다각화 했다. 1948년 3월에는 대구 원대동 1070번지에 자본금 3억원의 삼호방직(三頀紡織)을 설립했다.

그해 11월에 방기(紡機) 2천800추를 설치하고 조업을 개시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방기 3천200추를 설치해서 생산능력이 총 6천추로 확대됐다. 1951년 12월에는 자본금을 10억원으로 증자하고 삼호방직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52년 3월에는 방기 1천200추를 증설해서 점차 전국 규모의 섬유업체로 부상했다.

당시 삼호방직의 면사생산량은 1950년의 19만6천797근에서 1954년에는 515만8천518근으로 5년만에 무려 26배로 급신장했다. 설립 이듬해에 발발한 6·25전쟁이 무명의 삼호방직을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것이다.

해방 당시 38선 이북에는 소규모의 면방직 업체들만 있었을 뿐 대부분은 남한에 소재했는데 경성방직을 제외한 공장들은 전부 귀속업체들이었다. 또한 전쟁에 따른 포격과 징발, 약탈 등의 영향도 컸다.

"면방직 공업 시설이 입은 피해는 실로 컸으니 당시의 영남지역 소재 조선방직의 부산·대구공장과 삼호방직의 대구공장 등 3개 공장을 제외하고는 경중의 차이는 있었으나 전 면방직공장들이 피해를 면치 못했다. 이들의 피해는 전 면방직 시설의 70%에 달했다."(조선방직협회 '방협십년지', 1957년)

가장 대중성이 높은 면직물인 광목 1필(疋)의 가격은 1950년 12월 기준 6만3천원에서 다음해 12월에는 17만5천원으로 뛰었다. 극심한 생산 차질에 천정부지의 물가앙등이 가세한 결과였다. 전국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전쟁으로 초토화됐음에도 삼호방직은 대구에 위치한 덕에 전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삼호는 전쟁에 따른 전국적인 생산차질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삼호방직이 전시특수를 누릴 수밖에 없었던 구조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UN한국재건단(UNKRA)이 복구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UNKRA는 1960년까지 총 1억2천2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쏟아 부었다.

정부는 장기부흥계획에 의거, 방직시설 확충을 위해 1953년까지 총 591만647달러의 원조불을 14개 방직기업들에 대부해주었는데 당시 삼호는 47만1천 달러의 특혜 대부와 UNKRA 등의 지원을 받아 시설확충에 사용했다. 삼호방직은 1957년에는 직기 300대와 방기 3만1천600추의 대규모의 섬유업체로 거듭 났다.

당시 삼호방직에서는 '태백산' 상표의 광목과 '종표' 타래실, '무궁화표' 고급면사 등을 생산했다. 경영진으로는 사장 정재호, 부사장은 정재호의 친동생인 정재찬(鄭載瓚)과 창업 동지 정상희(鄭商熙) 등이 맡았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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