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판사와 판결

복거일

발행일 2017-09-15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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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해석일뿐' 이라는 현직판사 주장 큰 충격
비슷한 사건들 판결 다르다면 법 제구실 못해
한번 결정되면 사회 큰 변화 없는한 존중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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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사회평론가
인천지법의 한 판사가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며 "판사마다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진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등을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직 판사의 얘기라고 믿기 어려운 주장이라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치란 말의 뜻은 여럿이다.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정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치는 영향들을 뜻한다. 일상적으로 쓰일 때, 정치는 국가 권력과 관계된 일들을 가리키며, 이념과 당파가 두드러진 요소들이 된다. 이 둘 사이는 무척 넓고, 갖가지 뜻을 지닌 채 정치라는 말이 쓰인다.

그 판사는 정치라는 말이 하나의 뜻을 지녔다고 여겼고, 끝내 법의 본질에 어긋나는 결론에 이르렀다. 법이 정치적 현상이라는 사실과 판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 사이엔 큰 논리적 틈이 있다. 정치는 전자에선 너른 뜻을 지녔고, 후자에선 아주 좁은 뜻을 지녔다. 이 둘 사이의 틈은 너무 커서 그의 주장을 따르면, 인류가 다듬어온 법체계와 이론이 모두 그 사이로 빠져버린다.

법적 추리(legal reasoning)의 핵심은 연역적 추리다. 그래서 법체계는 본질적으로 연역적 체계다. 하위 법들은 상위법들로부터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 도출되고 재판은 법에 바탕을 둔 연역적 추리를 핵심으로 삼는다.

당연히, 법체계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법들이 서로 부딪치거나 비슷한 사건들에 대한 판결들이 서로 다르면, 법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거기서 '선례구속의 원칙'이 나왔다. 판결을 통해서 법체계는 자신을 확충해가므로 한번 판결이 나오면 사회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존중되어야 한다. 보편적 원칙인 '형벌불소급의 원칙'은 이런 원리가 시간적으로도 작동함을 일깨워준다.

현실에선 판사들의 해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법체계는 그 문제를 권위 있는 최종심의 판결로 대처한다. 이 상식을 판사가 거부한 것이다.

그 판사가 그런 견해를 지니게 된 것은 근년에 우리 사회를 휩쓴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법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특히 이데올로기 이론을 따른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도 그 사람의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편향되었다는 얘기다. 마르크스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편향되었다는 사실이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필연적으로 그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들을 상대적으로 만든다. 예컨대, 과학도 주술도 담론이니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범주에 속하면, 모두 가치가 같다는 얘기다. 그 판사는 판결마다 판사의 정치적 견해가 반영되니, 모든 판결들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선례들도 대법원의 판결들도 그저 다른 판사들의 판결이니, 마음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마르크스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놓친 것은 마르크스주의도 이데올로기고 포스트모더니즘도 담론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논파되었다. 과학과 주술이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도 아프면 굿 하는 대신 병원을 찾는다.

막 마흔 줄에 접어든 판사 한 사람의 주장이지만, 이 일은 보기보다 심중하다. 미국 대법원장을 지낸 찰스 휴스가 지적한 것처럼, 헌법은 실제로는 판사들이 그것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삶을 규제하는 법은 실제로는 판사들이 그것의 뜻이라 여기는 것을 뜻한다. 대한민국이 선 뒤 재판에 참여한 모든 판사들의 판결들을 그저 다른 사람들의 판단들이라고 가볍게 옆으로 밀어놓는 판사 앞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는 처지가 끔찍하지 않은가?

게다가 같은 견해를 지닌 판사들이 많고 그들이 만든 단체가 근년에 법조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 한다. 이번에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판사가 그 단체를 주도했다 하니,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대법원장 지명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서 이런 사정이 좀 더 명확하게 검토됐어야 했다.

/복거일 소설가· 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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