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7]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中)

軍에서만 20년 세월
아내가 살던 곳
그렇게 인천과 연이 닿았다

목동훈 기자

발행일 2017-09-2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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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클릭아트

오산비행장 시절 후임병 처조카와 결혼
현재 요양병원인 신신예식장서 식 올려
당시 포토존 활용 야외정원은 아직 남아

전역후 남구청 자리 교대 앞 문방구 열어
17년간 숭의2동 10통장도 함께 맡아 일해
쓸쓸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들 장례도 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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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온 김상국(87) 할아버지. 전쟁통에 고향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를 떠난 그는 군 제대 후 인천에 정착했다.

처가가 인천에 있어서였다. 1952년 9월 공군에 입대한 김상국 할아버지는 대구, 서울, 진해, 강원도, 오산 등지를 돌며 1972년까지 20년을 군에 있었다. 결혼은 1959년에 했다.

"오산비행장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지금의 처고모부가 우리 부대 신병으로 들어왔어. 당시 내가 이등상사였으니까 고참이었지. 한양대 기계과를 나온 분인데, 2년 정도 같이 있으면서 나를 잘 봤는지 '결혼해야 하지요?'라고 묻더라고."

그 후임병이 인천에 사는 자신의 처조카를 소개해 결혼했다. 장인어른은 인천세무소 직세과장이었다. 결혼식은 인천 중구에 있는 신신예식장에서 올렸다. "토요일에 결혼했어. 그때 토요일에는 세무소가 오전만 근무할 때가 아니요. 그런데 직세과장 딸이 결혼한다고 해서 세무소 전체가 근무를 하지 않았어. 세무소장이 주례를 봤지."

당시 신신예식장 인기는 대단했다. 신신예식장 사진부에서 약 33년(1959~1992) 동안 일한 정창근(84) 할아버지는 "사장 이름이 장광순인데, 돈이 많았다. 일본사람 사택을 사서 예식장으로 꾸민 것"이라며 "1년에 1천500쌍 정도는 식을 올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1966년 신신예식장에 근무할 때 결혼을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 옆에 생긴 크라운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며 "70년대 중반인가? 건물을 새로 지은 뒤에도 최고로 잘나갔다"고 했다. 예식장 직원의 결혼식조차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는 얘기다.

신신예식장 측은 밀린 예식을 빨리빨리 진행하기 위한 묘수를 꺼냈다. 건물 밖에 포토존을 설치한 거다. 정창근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가족·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신신예식장의 특징인데, 사실은 다음 팀이 몰려오니까 빨리 예식 자리를 빼주기 위해서 정원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이라고 했다.

청춘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던 신신예식장 건물은 지금 노인요양병원이 됐지만, 결혼 기념사진을 찍던 작은 야외 정원은 아직도 남아있다.

김상국 할아버지
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청 인근 한 건물 앞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약 12년(1972~1984) 동안 운영한 '대흥문방구'가 이 건물 자리에 있었다. 당시는 단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김상국 할아버지는 그렇게 인천과 인연이 닿았다. 아내도 인천 토박이는 아니다.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한국전쟁 때 가족이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인천은 함경북도 총각과 황해도 처녀를 맺어주었다. 둘 다 실향민 신세였지만, 아내는 가족이 함께 피란 나온 터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덜했다고 한다.

"마누라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지 않았어. 가족이 다 나왔으니까.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집 그거 못 찾겠어? 기억 속에 다 있는데."

김상국 할아버지는 1972년 제대 후 처갓집이 있는 인천으로 와서 지금 남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교육대학(현 경인교대) 앞에 문방구를 차렸다. 그 많은 장사 가운데 문방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만히 보니까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가 가장 안전할 거 같은 거야. 1972년부터 한 12년 동안, 그러니까 1984년까지 했네. 크게 성하라고 해서 '대흥문방구'라고 이름을 정했지."

인천교육대학의 전신은 1946년 5월 설립된 개성사범학교(경기도립 3년제)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인천교대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인천에 정착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남구청
인천사범학교 당시의 캠퍼스(인천시 숭의동, 1952~1962)

'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1946~2016)'에 따르면 1946년 5월 23일 설립된 개성사범학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졌다. 1951년 9월 부산시 괴정동에서 춘천사범학교와 함께 연합사범학교로 개교했다.

경기·인천지역이 어느 정도 수복되자 1952년 4월 잠시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신입생을 모집한 뒤, 인천숭의국민학교에서 개교했다. 그해 6월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53년 4월 인천시로부터 숭의동 땅을 기증받아 교지를 확보했다.

70년사는 "당시 전황으로 개성이 수복되기 어려운 상태였고, 휴전 성립의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었다. 학교의 운영 면에서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개성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개성보다는 인천에 사범학교를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인천 남구청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에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여우실 일대를 학교 부지로 내놓았다. 김경하(1911~1967, 초대 인천시 교육위원)가 개성사범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희사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남구청 종합민원실 자리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가 있던 곳이다.

김경하는 6선 국회의원이자 제11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은하(1923~2003)의 형이다. 김은하 전 의원 아들 근영(57, 인천경실련 공동대표) 씨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 학교(현 숭의초등학교) 건립에 기여하신 적이 있다"며 "교대 부지는 큰아버지(김경하) 등 아버지 형제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남구청
인천교육대학 본관(인천시 숭의동, 1975) 출처/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

인천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인천교육대학 발족 ▲1982년 4년제 대학 승격 ▲1990년 계산동 캠퍼스로 이전 ▲1993년 인천교육대학교로 교명 변경 ▲2003년 경인교육대학교로 개칭 ▲2005년 경기캠퍼스 개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교 이름을 경인교대로 바꾸고 경기캠퍼스를 설립한 이유가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시행된 이후, '경기교대 설립'은 경기도지사 출마자들의 대표적인 공약이 됐다. 경기도와 도교육청, 인천시와 시교육청, 인천교대가 해결 방안을 찾은 게 교명 변경과 경기캠퍼스 설립이었다.

문방구 고객은 교대생이 아닌 1957년 4월 개교한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마누라하고 같이 문방구를 봤지. 우리 가게 가까이에 '광문당'이라는 문방구가 먼저 있었어. 문방구는 방학, 주말 때문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어. 학생 수도 적었거든."

대흥문방구는 지금으로 보면 남구청 건물과 인천중앙교회 사이 골목에 있었다. 지금은 1층에 사진관을 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 경쟁 상대였던 광문당은 남구청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부속국민학교를 '부국'이라고 줄여서 불렀는데, '부'자가 부속의 부(附)가 아닌, 부자의 부(富)라고 말할 정도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부국 학생들 가정은 생활 수준이 우리와 달랐어. 당시에도 자가용을 타고 오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교복을 입었는데, 얼굴이 희고 피부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

문방구에선 이것저것 다 팔았다. 도화지 등 학용품부터 체육복과 실내화,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손버릇이 나쁜 아이들이 있어서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국산 호치키스(스테이플러)가 없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거 사다 놓았어. 그런데 한참 쓰다 보면 어느 날 없어지는 거야. 탐내는 아이들이 있었던 거지."

부국 24회(1983년 2월 졸업) 권혁신(47) 씨는 대흥문방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권씨는 "학교 주변에 광문당 등 문방구가 3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흥문방구였다"고 했다.

또 "학교는 부모님이 흰색 공인가? 검은색 공을 뽑으면 입학할 수 있는 추첨 방식이었다"며 "다 부잣집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집안이 어느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문방구를 운영하면서 통장 일도 봤다. 문방구는 1984년까지 운영했고, 숭의2동 10통장은 1989년까지 약 17년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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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옛 신신예식장 건물에 있는 야외 정원 모습. 신신예식장은 김상국 할아버지가 1959년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야외 정원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게 특징이었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어, 환자와 문병객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숭의동에도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인천시사(1993년 발간)'를 보면, 1952년 말 인천 인구(25만6천751명)의 51.1%인 13만1천128명이 구호대상자였다. 구호대상자 가운데 6만3천433명(48.4%)이 피란민이었다.

숭의동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말 숭의동 지역 구호대상자 5천561명 중 2천987명(52.9%)은 피란민이다.

"지금도 구청 주변에 하꼬방들이 있어. 피란민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집이라고 해봤자 하꼬방이라고 조그마한 곳이지. 그곳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거야."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돈을 걷어 실향민 어르신의 장례를 치른 적이 3번 정도 있다"며 "좀 살만한 집에 가서 얼마 좀 보태달라고 해서,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서울 코엑스로 일을 다닌 적도 있다. 선광공사(현 선광) 일을 맡아 코엑스 행사장에 전시품을 설치했다.

"숭의동에 인천항 지게차 운전수들이 많이 살았어. 우리 10통에 사는 운전수 소개로 코엑스 일을 하게 됐지. 선광공사에 취직한 건 아니고, 그냥 밑에서 '일당벌이'를 한 거야."

할아버지는 "선광공사에서 코엑스 전시 일을 맡았다가 (수익이) 별로니까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기억했다. 선박 하역회사 선광이 한때 전시품 설치 대행사업을 하기도 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남구청
인천 남구청 청소년수련관 앞 화단에 세워진 경인교육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표지석. '1957년 준공한 이 건물은 좋은 선생님의 초심을 키운 곳이요, (중략) 근대문화유산으로서도 보존가치가 큰 자랑스러운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68년부터 1998년까지 선광에서 근무하면서 전시 업무도 맡았던 오대영(78) 할아버지는 "(선광은) 76년부터 77년까지 약 2년간 서울 여러 곳에서 전시 업무를 했다"며 "일본에서 전시품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이것을 코엑스로 운반해 조립·설치했고, 전시회가 끝나면 전시품을 분해한 후 상자에 넣어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했다.

또 "(일본에서 전시품을 배로 싣고 오는) 고려해운이 선광에 소개해줬고, 1~2년 정도 선광이 하다가 다른 업체에서 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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