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28]삼호방직-3 삼호그룹으로 도약

'조선' '대전' 접수한 삼호 '방직재벌' 탄생

경인일보

발행일 2017-09-19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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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직 부산공장
1950년대 조선방직 부산공장. /부산박물관 제공

귀속재산인 면방직 민간 불하때
정재호 사장은 '대전방직' 받아
최대 규모 조선방직까지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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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한국전쟁 무렵에 귀속재산인 면방직업체들의 민간 불하가 단행됐다. 1951년에는 전남방직(광주공장), 대전방직, 동양방직(인천 학익공장) 등이, 1952년에는 동양방직(인천공장)과 전주견모(絹毛)방직이, 1953년에는 제일방직과 대아방직이, 1955년에는 동양방적(인천공장)과 조선방직(부산, 대구공장) 등이 각각 민간에 불하됐다.

이 업체들은 당시 국내 굴지의 방직업체들로써 이들 중 한 업체라도 불하를 받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정재호는 대전시 유천동 10번지에 있는 대전방직공사(풍한방직의 전신)를 불하받았다. 1942년 12월에 조선오우(朝鮮吳羽)방직㈜로 설립된 것을 1946년에 미군정이 귀속기업으로 접수해서 1949년에 조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6·25전쟁으로 방기 전부와 건물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된 채 1951년 10월에 12억 5천만 원에 매각처분됐다. 1953년 3월에 자본금 500만환의 대전방직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정재호가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운크라(UNKRA) 원조자금 94만 1천967 달러로 방기 1만 8천480 추를 배정받았다.

1954년 12월에 방기 2만 3천856 추를 설치 완료하고 조업을 개시했다. 1956년 7월에는 자가발전기 3대를 설치해 전력부족으로 인한 조업중단에 대비했으며, 1957년 1월에는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직기 600대를 설치했다.

생산능력이 방기 2만 9천456추와 직기 600대로 늘고 여공(女工)수만 2천여 명에 이르는 전국 굴지의 메이커로 부상했다. 대전방직은 1960년대에는 국내 3대 방적기업의 하나로 성장했다.

정재호는 6·25전쟁특수로 확보한 자금으로 1956년에는 최대 규모의 면방업체인 조선방직 부산공장까지 불하받아 국내 최대의 면방직 기업집단을 완성했다.

조선방직은 1917년 11월 10일 부산시 동구 범일동 700번지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면방직업체로 1922년부터 조업을 개시했다. 1935년 8월에는 부산공장에 인견(人絹) 직기 319대를 갖춘 인견공장 건설에 착수해 인견포(人絹布)까지 생산했으며 또한 같은 해에 조선 최초의 기계제 염색공장을 건설했다.

해방 이후 귀속재산 가운데 최대의 기업이었던 조선방직은 방적기 4만720추, 연사기 6천760추, 면직기 1천232대, 인견 직기 319대, 모포 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조면공장과 대구 메리야스공장도 보유했다.

방적, 염색, 나염, 피복에 이르는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종업원 3천200여명을 거느린 부산 최대의 공장이었다.

조선방직은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화해서 1946년 5월에 한일실업공사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47년 12월에는 북한의 단전조치에 대비한 자가발전시설 복구공사를 완료하고 주야 2교대 근무체제로 전환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로 대구메리야스공장을 분리하고 그해 11월에 대구방적공사(구 군시(郡是)방적회사)를 통합했다.

1955년 2월에는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임대계약해 그해 8월에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알려진 강일매(姜一邁)가 사장에 취임했다. 10월에는 조선방직 부산공장을 정부로부터 35억 환에 불하받았다. 1957년 1월 기준 방기 5만304추, 직기 1천693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섬유메이커였다.

당초 조선방직은 부산지역의 대표 기업인이자 한국생사그룹의 창업자인 김지태(金智泰)가 오래전부터 점을 찍어두었었다. 김지태는 일제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실업가로 해방과 함께 미군정 관재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정치와 사업을 겸했던 부산지역의 유력인사였다.

그는 1948년부터 조선방직 이사직을 겸하고 있어 1951년 3월의 조선방직 민간불하에서 최고 유력자였다. 그런데 불하 3일을 앞둔 3월 16일에 '조방낙면 사건'으로 조선방직과의 인연이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역사가 뒤바뀐 것이다.

강일매는 1955년 10월 29일에 조선방직을 35억환(약 550억원)에 불하받았다. 연고권자에 우선 불하한다는 귀속재산처리법도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59년 10월 강일매가 사망하면서 조선방직은 삼호방직(정재호)에 인수됐다. 정재호는 손수 창업한 삼호방직 외에 적산인 조선방직과 대전방직까지 확보해 국내 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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