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8]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下)

"명절이면 어릴적 추억 떠올라
형과 누이·동생은 살아있는지"

조재현 기자

발행일 2017-09-28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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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성진항 인근 단층집서 농사일 / 정어리 많이 잡혔는데 기름부터 담았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
친구들과 먹던 '섭죽' 못잊어 / 마천령·망양정 함께 다녔던 그들은 인천서 만났지만 먼저 떠나
추석 앞두고 수봉공원 망배단 찾을 예정 "통일이 아니어도 고향 방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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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국(87)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1·4후퇴 시절인 1950년 12월 피란을 떠났으니, 20년 정도 고향에서 살았다. 부친은 농사일을 했다.

"여러 농사를 지었지. 그때 당시에는 농토가 어느 정도 있었어. 부유한 것은 아니고 중간쯤 됐던 거 같아. 자작 농사지, 소작 준 것은 없단 말이지. 소작 준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해서 해방 이후에 고생 좀 했어."

김상국 할아버지 집은 성진항 인근에 있었다. 부친이 나무로 만든 단층집이었다. 방 3개, 부엌 1개, 마루 1개. 그리고 마당에는 조그마한 텃밭과 창고가 있었다. 집에서 성진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성진항을 보면 무역항과 어항이 있는데, 나는 어항 쪽에 살았어.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그 동네에는 배 타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

김상국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해산물로 명태, 정어리, 임연수어, 고등어, 섭(홍합과 조개) 등을 꼽았다. 할아버지는 "바다와 가까워서 명태, 고등어 등 생선이 밥상에 올라왔다"며 "우리 어렸을 때는 정어리가 무지하게 많이 잡혔다. 정어리로 기름도 짜고, 그냥 조려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어리는 다양한 곳에 쓰였다. 일본 저널리스트 다케쿠니 도모야스가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쓴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를 보면, 정어리는 주로 유비(油肥)로 가공됐다. 정어리기름에서는 화약과 의약품의 원료인 글리세린이 나왔다. 지방산은 비누·초·도료·마가린의 원료가 됐으며, 찌꺼기는 비료와 사료로 쓰였다.

전쟁통에 정어리만큼 수난(?)을 겪은 물고기도 없을 듯하다. 몸에서 짜낸 기름은 물론이고, 그 기름을 담고 있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됐다.

정어리기름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는 등 군수 자재였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정어리 어획을 '중점 조업 목표'로 정하고 정어리잡이 어선에 중유를 집중적으로 공급했다. 또 날정어리 식용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등 화약 원료를 얻기 위해 정어리기름 생산을 중요시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정어리기름을 담아 놓는 탱크가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일본놈들이 그 탱크까지 뜯어갔다"며 "철이 부족하니까 밥그릇 등 닥치는 대로 다 빼앗아 갔다"고 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성진에는 큰 규모의 제강소가 있었다. 제강소는 인천의 한국지엠 공장처럼 성진 지역경제의 큰 축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고주파공장이 성진에 있었어. 왜정 때부터 있었지. 일본놈이 운영했어. 여기서 만든 철을 성진항과 기차를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지. 지금도 가동이 되고 있을 거야."

제강소 명칭은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이며, 지금은 '성진제강연합기업소'라고 한다.

1945년 성진중학교 1학년이었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41년 만에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눈 책이 있다. '그때 우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나일성·사가에 다다시 공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고주파공장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사가에 다다시는 "고주파공장 때문에 일본 사택들이 많이 세워져 일본인 소학교와 큰 백화점이 성진시내에 생겼다"고 했고, 나일성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기차역(신성진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임원·정직원·공장노동자를 위한 사택만 1천800호에 달했으며, 이들을 위한 구락부·병원·학교·공중목욕탕까지 설치됐다. '신 북한 지리지'(배기찬 지음, 1994년)를 보면 성진제강연합기업소는 북한 전체 제강·제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김상국 할아버지도 성진중학교 졸업생이다. 이 책 저자들이 32년생과 33년생이니, 할아버지가 이들보다 2~3살 많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매형은 고주파공장에서 기중기 기사로 일했었다.

할아버지는 "해방된 후에 소련에서 고주파공장 기계를 많이 가져갔다"며 "해방 후에 일본 기술자들이 다 도망가니까 공장 돌리는 법을 몰라 한참 중단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소련군을 '로스케' '마우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여자를 괴롭히고 물건을 강탈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섭죽'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성진 바다 밑에서 캔 섭 조개는 커. 친구들이랑 집에서 가져온 쌀을 함께 넣어 죽을 쑤어 먹고 그랬지. 한번은 조개를 잡았는데 조그마한 진주가 들어 있어서 집에 가져간 기억이 있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부둣가에서 장기도 뒀다"며 "낮잠을 자고 있는 어르신들 옆에서 일부러 '장이요!' '멍이야!'라고 소리칠 정도로 장난도 심했다"고 했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김상국(사진 가운데), 임영록(아래), 김현덕(위) 할아버지가 고향 성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현덕 할아버지가 피란 때 가지고 온 사진을 김상국 할아버지가 복사해 간직하고 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옷차림이 고등학교 교복이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성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김상국 할아버지 제공

함경북도지편집위원회가 2001년 발간한 '함경북도지' 성진시 편에는 섭죽이 나온다. 이 책은 "이것(섭)을 따다가 임연수어 같은 생선을 잡아 된장, 고춧가루, 소주, 마늘, 과일 약간에다 쌀을 씻어 죽을 끓이면 그야말로 별미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일품"이라고 섭죽을 소개했다.

김상국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곳은 마천령과 망양정이다. "마천령이 아흔아홉구비야. 높이도 꽤 있지. 가을에는 마천령 단풍이 아주 유명해. 소풍도 거기로 갔어. 망양정이라고 있는데, 거기 올라가면 바다를 쫙 내려다볼 수 있었지."

망양정은 500m 높이의 절벽에 있는 정자다. 등대와 측후소가 있었고, 러일전쟁 때는 포대로 이용됐다. 1929년 시멘트로 다시 세워졌다.

함경도 출신 여류 시조시인 오신혜(1913~1978)는 '망양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망양정(정자)에서 본 풍경을 노래한 시다.

'(상략) 근방의 인가들이 눈 아래 깔려있고 / 몇 십길 절벽 밑에 만경창파 아득하니 / 한덩이 구름을 타고 바다 위에 뜬 듯하이. // 기빨을 날리면서 돛단배들 흩어지고 / 파도에 풍류맞어 갈매기떼 춤을 출제 / 우렁찬 평화의 곡에 귀가 절로 기운다. (하략)'

성진에서 태어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1908~?)도 '망양정-어린 꿈이 항해하던 저 수평선'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정자가 무너져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고, 정어리기름으로 바다가 오염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글이다.

김기림은 이 글에서 "인천이라고 하면 월미도, 목포라고 하면 유달산, 원산이라고 하면 명사십리. 그렇게 각각 배 맞은 풍경이 있으나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항구 성진에 망양정조차 없었으면 실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근년에는 정어리 공장이 들어앉아 고기 기름에 바닷가는 아주 더러워져서 보잘것없는 우중에 저수장이 되면서부터 해안 일대를 완전히 콘크리트로 포장을 했다. 인제는 아이들도 갈매기도 더 모여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로맨티시즘은 추방을 당했다"고 했다.

김기림은 인천항과 인천역의 모습을 담은 연작시 형태의 '길에서-제물포 풍경'을 남기고 인천 문인들과 교우하는 등 인천과도 가까웠다.

인천 월미도 역시 일제강점기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도 변했다. 인천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문학평론가인 김동석(1913~)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월미도 풍경처럼, 이곳에서 바라본 석양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수직의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둘씩 해안가를 차지하고, 기후변화와 산업화로 바다 환경이 나빠진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상국 할아버지
김상국 할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는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다. 성진항은 1899년 군산, 마산과 함께 개항한 곳으로 원산에 버금가는 항구였다. /출처 '가야할 산하'(민족통일중앙협의회, 1987)

김상국 할아버지에게는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 '임영록'과 '김현덕'이 있다. 우연일까. 김상국 할아버지를 비롯한 '삼총사' 모두 인천에 정착했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함께 피란 내려온 임영록 할아버지는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김현덕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살다가 삼촌이 전무로 있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모두 인천에 모였건만, 김상국 할아버지는 친구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인천에 살면서 종종 만났지. 가끔 대포도 한잔하고 그랬어. 영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산소까지 함께 다녀왔었는데, 꿈에 그리던 고향도 못 가보고 병에 걸려서 떠났지." 김상국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친구(김영록) 아버지의 배(어선 '성진호')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나왔었다.

10월 4일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명절 때 고향 생각이 가장 많이 나. 이때쯤 되면 누가 집에 오고, 산소에 제사를 지내러 언제 가겠다는 것부터 다 생각이 나지."

할아버지는 "위로 형이랑 누나가 1명씩 있고,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내가) 세 살 아래 여동생(김월성)을 가장 예뻐했다.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고향 성진에 모여 추석 명절을 보내고 망양정에 올라 성진 앞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는 올해도 글렀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추석을 앞두고 인천 남구 수봉공원 망배단에서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릴 예정이다.

할아버지는 "형과 누이, 동생들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며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고향 방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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