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9]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上)

해방 후 소련군의 횡포… 고향 떠난 소년의 치열했던 70년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7-10-1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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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실향민 호성신 할아버지3
8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택시운전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해남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피란 후 70년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

목수였던 부친, 넉넉한 형편 불구
부녀자 희롱 등 심해져 월남 결심
개성구호소 거쳐 인천으로 '이주'
전쟁 터져 목포에 잠시 머물기도

고교땐 짝사랑 따라 서울로 통학
졸업 후 미군부대 운전기사 취직
영어공부 덕에 정식 군무원 '승진'
영진공사로 옮겨 바레인서도 일해
대한항공 '인연' 고속버스 기사로
이후 30년째 고령에도 택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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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해주에 살던 호성신(81) 할아버지는 1947년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 때 잠시 전남 목포로 피란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고향을 떠나온 70년 세월을 한동네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운전사이다.

인천에 80대 이상 고령의 택시운전사는 호성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14명뿐이다. 할아버지의 운전 내력을 보자니 첫 근무지였던 인천 미군부대 역사까지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현장인 바레인에서도 일했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주시 선산동 28은 황해도 도청 인근의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집 짓는 목수였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았다.

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주둔하고 정세가 급변하자, 단란했던 할아버지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병사가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초등학생이던 10살 때 일이다.

"1946년 여름이 지나서부터 소련군이 해주에 엄청나게 들어왔나 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도 빼앗고 부녀자들 희롱하고 횡포가 심했어. 소련군 병사가 우리 집에 막 들어와 어머니를 해코지하려고 해서 부엌으로 숨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결심했지. 아버지가 (해방 전에)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근무하며 어울린 것도 월남한 이유 중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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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신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봄에 새벽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울 속에 돈을 숨겼고, 어머니도 배에 전대를 차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았다. 그게 할아버지 식구가 가지고 내려온 전 재산이다.

군인이던 친척이 식구들을 체포해 가는 것처럼 꾸며 해주 남쪽 바닷가인 용당포로 데려가 줬다고 한다. 친척이 미리 준비해준 조그만 목선을 얻어탔다. 바지락을 싣는 배였다. 배 밑에 어머니와 남매가 숨었고,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저어 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질퍽질퍽한 갯벌에 배가 닿은 뒤 남한 경찰 2명에게 발견됐다. 남한 경찰은 할아버지 식구를 개성에 있는 월남인 수용소인 개성구호소로 보냈다.

1946년 중반 북쪽이 토지개혁 같은 체제정비를 본격화하면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온 이북 출신 주민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개성,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설치해 북쪽 주민들을 며칠간 머물게 하고 전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연중기획/대중일보 기사
대중일보 개성구호소 특파원 취재 보도-북한 실향민이 몰린 개성구호소를 특파원이 현장취재한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이었다.
1947년 4월 말 기준으로 월남 인구가 45만명을 돌파했다고 동아일보는 1947년 5월 31일자에서 보도했다. 당시 인천에도 5만 명 넘는 북한 출신 주민이 정착했다. 같은 시기 수도 서울로 유입된 북한 주민은 약 11만2천명이었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태동한 대중일보는 인천에 실향민이 몰리자 개성으로 특파원을 보내 구호소를 취재하기도 했다.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는 실향민들이 대개 옹진에서 배를 타고 청단으로 건너와 기차를 타고 토성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고 실향민 이동 경로를 파악해 보도했다.

개성구호소는 미군 천막을 치고 내부에는 접이식 침대가 2열로 놓여 있었다. 천막 수는 총 82개인데, 한 천막에 35~40명을 수용했다. 구제품은 거의 '운라(UNRRA·연합국구제부흥기관) 구제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실향민들은 대부분 침구와 옷가지를 준비해 내려왔고, 현금도 1천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대중일보는 전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네는 개성구호소에 4일 정도 머물다가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이주해 판잣집에 살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다시 목수 일을 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송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6·25가 일어나자마자 월미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지금 있는 선창산업 공장 쪽에서 화물선 타고 많이들 피란길에 올랐어. 이북 출신이 많았을 거야. 원래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목포에서 멈췄지. 목포역 앞에 있던 커다란 창고가 피란민 수용소였는데, 5개월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수동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어. 아버지가 목수 일감 찾으면서 빵 장사도 하고, 담배도 말아서 팔고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어."

전쟁통에 인천으로 돌아온 호성신 할아버지는 1947년 허섭(許燮·1925~2010)이 설립한 성광중학교를 다녔다. 남구 도화동 선인중학교의 전신인데, 할아버지가 학생일 때는 동구 만석동 현 삼화제분 인천공장 자리에 있었다. 허섭은 성광중학교로 출발해 1953년 재단법인 성광학원을 설립, 인천에서 성광고등학교, 성광고아원도 운영했다.

그러다 갑자기 1950년대 중후반 군 장성인 백인엽(白仁燁·1923~2013)에게 성광학원을 넘겼다. 이때 출범한 게 한때 국내 최대 사학으로 이름을 떨친 선인학원이다. 이 선인학원은 나중에 사학비리가 문제가 돼 진통 끝에 사회환원 조치됐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성광학원 설립자 허섭을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성광학원을 백인엽이 인수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던 듯하다.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009년 쓴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1956년 여름 허섭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백기완 소장은 '그즈음 그분은 준심(정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이 못살게 굴어 손수 일군 인천 성광고아원과 성광상업선배울(고등학교)을 빼앗기고선 서울 마포 구석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터라'고 언급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경제적 보탬을 준 허섭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짝사랑했던 동네 여학생이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간다기에 함께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학생과는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취직할 때 써먹을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57년 초반 인천시청(현 중구청) 쪽 시내에서 월미도 미군부대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팻말을 봤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호성신 할아버지도 냉큼 돗자리에 앉았는데,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월미도 미군부대 소속 장교 차량 운전기사로 뽑혔다.

당시 미군부대 한국인 근로자는 부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고용했다. 부산 미군기지에서 1954년부터 20년 동안 일한 박원찬 씨가 1978년 쓴 수기 '미군과의 20년'을 보면, 부산에서도 매일 미군부대 정문 앞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어 오전 10시마다 나오는 인사담당 직원을 기다렸다고 한다.

미군부대 장교와 한국인 인사담당 직원이 정문 밖으로 나오면 구직자들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고 치고 하면서 소란도 벌어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장교 운전기사로 2년 정도 일한 뒤 인천항에 파견된 미 해군 군사고문실로 일터를 옮겼다.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두고 미 해군 대령 1명을 포함해 부대원 8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 해군 군사고문실에서 10년 동안 미 해군 대령의 차량을 몰았다.

이후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에서 차량 배차를 담당하다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정식 군무원(Government Service)인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모터풀(Motor pool·수송대) 드라이버에서 시작해 군용차 디스패처(Dispatcher·운행관리원),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하기까지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어. 문법책 달달 외운 끝에 승진시험에 딱 붙었지. 말뿐 아니라 글까지 영어로 쓸 줄 아는 한국인 미군부대 근로자가 흔치 않을걸."

연중기획 실향민 인천내항 미군 전용 함교
1969년 촬영된 인천내항 미군 전용부두 잔교. 호성신 할아버지는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에서 미국 중장비 하역감독을 맡아 인천내항에서 일했다. 출처/인천항사(2008·인천항만공사)

인천항에서 주한미군 군수물자 하역작업은 영진공사와 국제실업이 하청을 맡았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인천항 중장비 하역작업 때 미군 소속은 나 하나뿐이라 타임 스케줄도 내가 다 짰다"며 "하청업체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신포동 기생집을 데려가려고 애도 많이 썼지만,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애스컴이 대폭 축소된 이후인 1970년대 말 영진공사에 입사해 중동 바레인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에 '중동붐'이 한창일 때인데, 바레인 항만에서도 중장비 배차과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19일자는 인천을 기반으로 둔 영진공사가 물류산업 분야 최초로 바레인과 항만·공항 하역계약을 독점 체결해 하역요원 800명을 현지로 파송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1976년 중동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바레인 간 정기노선을 취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최전방에 있던 호성신 할아버지는 바레인 현지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직해 항공기 기내식 총괄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1년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대한항공 임원 소개로 한진고속 소속 고속버스 기사가 됐다. 1987년까지 부산, 대구, 포항, 마산 등지를 사고 없이 달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내무부장관 또는 교통부장관 표창이 있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어 할아버지도 혜택을 봤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올 5월 국가로부터 25년 무사고 표창을 받은 할아버지는 "착오가 있어 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론 30년6개월 경력의 무사고 택시운전사"라고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수송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로 외국인 감독을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영어 실력에 외국인 감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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