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1]삼호방직(완)-6 몰락

반사회적 기업인 '낙인' 최후의 사망선고
조선방직·제일화재 처분 '쇠락'
1972년 8·3조치 '사채' 악재로
정재호 업무상배임 구속 '쐐기'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삼호는 1960년대 이후에도 착실하게 다각화작업을 전개한다. 1966년 4월에는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해서 부수사업으로 독립신문기념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경북염색가공(주)를, 1971년에는 제주축산(주), 삼양흥업(주) 등을 각각 설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호그룹은 하향길로 접어드는데 결정적 신호는 1967년 조선방직 매각과 1968년 제일화재의 처분이었다.



1968년 4월에 조선방직은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직할시에 인수됐다. 화학섬유의 등장에다 방만한 경영, 기계의 노후화 등이 겹치면서 1969년 7월 부산직할시가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해산시켰다. 제일화재해상보험은 1968년 9월에 한화그룹에 넘겨졌다.

1967년에 정재호는 33세의 장남 규진(奎鎭)을 기획부장에 임명해 경영난을 수습하려 했다. 규진은 삼호그룹의 재기를 위해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8년 5월에는 대전방직과 삼호방직의 소유권문제로 법적 소송사건이 불거졌다. 정재호의 친동생이자 창업동지이기도 했던 정재찬(鄭載璨)이 정재호를 상대로 대구지방법원에 삼호방직의 주권인도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69년 초에는 정재호의 동업자이자 오른팔이기도 했던 정상희(鄭相熙) 삼호무역 회장이 부하들과 함께 경쟁업체인 삼성으로 이직했다. 제3대(1954~58)와 5대(1960~61)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상희는 현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친할아버지다.

삼호는 경기불황이 겹치고 업종전환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1960년대 말에 쇠락했다. 삼호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소위 '8·3조치')이었다.

'8·3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기업들은 8월 9일까지 전 사채를 신고하고 신고된 사채는 월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채권, 채무관계로 조정한다.

2천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대출금 중 30%를 대환(代煥)한다. 신용보증제도를 확충한다. 기업의 투자를 위해 투자세액을 공제한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법정교부금을 폐지한다.'

마감일인 9일까지 총 3천456억 원의 사채가 신고됐다. 3만9천676개 업체가 월평균이자 3.84%로 이 같은 사채를 지고 있었다. 또한 신고결과 1973년 현재 81개 업체, 73명의 기업인들이 기업자금을 빼돌려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기업주들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하는 이른바 '위장사채'만도 총 신고금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137억 원에 달했다. 이 중에는 사채로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유명 기업인들도 있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는 기업의 오너경영인들까지 위장사채업자에 포함된 것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급기야 1973년 4월, 81개 업체 73명의 반사회적 기업인 명단이 발표됐다. 삼호방직 정재호, 동해실업 강숙현, 성광무역 김정만, 한국철강 신영술, 대성산업 조영일, 동양고무 현수창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향후 5년 간 금융지원 중단, 당사자와 연대보증인들에 대한 세무조사 및 검찰 조사가 진행됐다.

은행들은 20개 기업 14명의 기업인을 횡령, 배임, 수표부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삼호방직 정재호, 연세개발 박용운, 광성공업 고정훈, 동해실업 강숙현, 한국알미늄 장영봉 등이었다.

강숙현, 정규성, 장인섭 등은 업무상횡령으로, 장영봉은 배임과 사문서위조로, 최경남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나머지는 수배됐다. 철퇴를 맞은 부실기업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삼호그룹의 정재호였다.

1974년 8월 1일 서울지검 경제부의 이한동 검사는 반사회기업인으로 기소된 삼호의 정재호에 업무상 배임횡령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970년 8월부터 그해 10월 사이에 삼호방직에서 1억원을 인출, 주식으로 값어치가 전혀 없는 삼호공업의 주식을 사들임으로써 삼호방직에 1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혔으며 삼호방직의 회사공금 1천300만원을 임의로 인출해서 사생활에 사용한 혐의였다.

정재호는 1973년 8월 8일에 검찰에 구속되었다가 10월 12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60년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던 왕년의 최고재벌 정재호에게 반사회적 기업인이라는 낙인은 최후의 사망선고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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