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글은 진서와 훈민정음이고 10월 9일은 한글날이 아닌 정음날

강정모

발행일 2017-10-31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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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모-경희대 명예교수'
강정모 경희대학교 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글은 2009년에 이어 지난 10월 1~4일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회 세계문자올림픽에서 또 다시 1위를 차지하면서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566돌 한글날에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은 기쁘지만 한글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글( )은 민족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문화의 결정체일 뿐만 아니라 자긍심과 애국심의 원천이고 국력의 상징이다. 따라서 한글은 한겨레문화의 결정체이며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서 숨 쉬는 역사의 화석으로 한류의 원천이기도 하다.

한글(韓 )의 정식명칭은 한겨레 글이고 원래는 그냥 글( )이나 서(書)라 했다. 그래서 글 가르치는 곳을 글방 또는 서당이라 했다. 한글은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해례에 의하면 진서와 훈민정음이지 훈민정음만이 아니다. 한글학회에 의하면 한문(漢文)이 우리말 어간의 약 70% 정도이며 한문은 어간처럼 괄호 안에 쓰도록 되어 있다.

조선의 공식문자는 진서(속칭 漢文)이었다. 훈민정음은 옛글인 대전과 주로 소전의 전서(篆書)와 이두(吏讀) 등을 본받아 만들었다. 초·중·종성은 주로 일자 일음 발음부호 절운에서 나왔다. 정음은 글이 아니라 진서 훈음과 진서를 모르는 민중이 쓰던 이두를 혁신한 진서 보조수단이자 대체용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에서 정음을 공식문자로 사용한 적이 없다. 훈민정음 반포 후 451년 만인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훈민정음을 공식문자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고작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 훈민정음해례, 족보 등 모두가 진서로 기록되었다.

글이나 서를 한글과 한문이라 나눈 것은 왜(倭)였다. 한글과 한문은 왜가 명치유신 무렵에 '조선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까지 문자가 없이 漢文을 빌려 쓰는 미개한 소국이므로 문명 선진 대국 왜의 문물과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다'를 강조하기 위해 만든 용어였다. 이를 모화주의에 빠진 조선의 주자·정자·성리학 추종자들이 글이나 서를 한문이라 하고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이 진서를 알면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왜보다 유구하고 우수함을 알게 되어 조선의 자주성과 정통성이 강하여 일본의 순치와 식민통치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서문맹을 만들려는 혹세무민의 음모가 날조한 것이 한글이 곧 훈민정음이라는 도식이었다.

한글이 곧 훈민정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묻기 위하여 일제가 날조한 말로 우리 역사와 세종대왕을 모욕하는 처사이다. 한글전용만을 기념한다면 현재의 한글날은 정음날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따라서 10월 9일이 진정한 한글날이 되려면 진서와 정음이 함께 교육되어야 한다. 한글날의 유래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한글날은 1927년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가갸날이라 하였다. 가갸날은 훈민정음이 세종 28년(1446년) 음력 구월에 반포되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그 480주년을 기념하여 명명한 기념일로 음력 9월 29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어연구회에서 1927년 창간한 학술지 '한글'에 맞추어 한글날로 개악한 것이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변경을 거쳐 1932년에 음력 9월 29일을 양력 10월 29일로 고쳤다. 그러나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자 정인지 서문의 반포일인 9월 상한을 9월 10일로 추정한 다음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정하였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은 그 기록이기 때문에 말은 바르고 논리가 정연해야 하며 인격과 교육수준의 제1차 평가척도인 동시에 선진학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어보다 외국어를 먼저 가르치고 외국어를 안 쓰면 말을 못하는 사람은 무늬만 한국인일 뿐 얼이 나간 얼간이라 할 수 있다.

/강정모 경희대학교 경영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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