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2]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上)

홍현기 기자

발행일 2017-11-0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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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0일 연중기획 실향민 전진성 할아버지 (3)
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 부평구에 있는 자택에서 피란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배 '매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거제로
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같은 배 타고 피란
몇십리 걸어 도착 "하룻밤 묵었다면 잡혔어"
"기중기 달린 어망에 담겨 승선" 증언 눈길

장승포 초교·어망창고에 머물다 자원 입대
대구 육군본부 행정병때 송해와 함께 근무
부대행사 때마다 남다른 입담 자랑해 기억
제대 후 부평서 결혼 60년 세월 떠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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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전진성(88)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을 나왔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1만4천여명)을 구한 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를 보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중 부산, 일본 등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날에는 인천항에 들어와 탄약, 탱크 등을 해군 상륙함정(LST)에 실어줬다. 흥남철수 당시에는 부산에 제트기 연료를 운반한 뒤 작전에 투입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이 배를 탔고, 경남 거제에 온 지 2년 만인 1953년 1월 문 대통령을 낳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와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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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전문가들은 흥남철수작전을 현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Operation Dynamo)과 비교한다. 덩케르크 작전으로 33만8천명의 영국, 프랑스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는데, 흥남철수작전으로는 유엔군 10만 명뿐만 아니라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은 민간인 10만 명도 구출됐다.

두 작전은 모두 흥행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는 국내에서만 2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흥남철수작전은 역대 2위 누적 관객(1천420만명)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황덕호 명예회장은 '흥남철수작전 역사서 아! 흥남철수' 축사에서 "덩케르크에서는 피란민 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완전무장을 하고 상당한 기동성을 갖춘 정예대군이 오히려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철수하기에 바빴던 철수작전이다. 반면 흥남철수작전은 군 병력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한 10만여 민간인이 군과 거의 동수로 함께 철수한 인도주의적 작전이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전진성 할아버지는 고향인 단천에서부터 무릎 높이까지 오는 눈길을 뚫고 쉼 없이 걸어 흥남철수작전의 행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경도 피란민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흥남부두로 몰렸다. 할아버지는 "중간에 하룻밤을 묵기라도 했으면 중공군에 잡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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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폭파되고 있는 흥남시가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새벽 동네에 주둔하던 국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친척 3명과 함께 보따리를 싸 들고 단천항구로 갔다.

할아버지는 단천항에 출발하는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함경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화물열차를 탈 수 있었고, 북위 40도선에 있는 '퇴조'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흥남항까지 밤새 20리 길을 걸었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이미 10만 명이 넘는 많은 피란민이 몰려있었다. 당초 미군은 흥남항을 통해 군 병력만 철수시킬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민간인까지 함께 상륙함정과 화물선 등에 실어 피란을 시키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흥남철수 작전이 '현봉학 박사'라는 사람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당시 미군을 설득해 민간인들을 구출한 흥남철수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 대탈출'에서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 등을 설득해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흥남항구에 있으면서 미군 병력 철수를 위해 직접 군수물자를 실었다가 민간인을 태우기 위해 다시 각종 물자를 내리는 일을 했다.

당시 가공식품 깡통 등 각종 군수물자를 항구에 내려놓은 뒤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모두 불살랐다고 했다. 접안시설도 이용할 수 없도록 모두 부숴버렸다.

김훈의 장편소설 '공터에서'에도 이 같은 흥남철수 과정이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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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하고 있는 피란민들.
"미군은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작정이었다. 미군의 철수 계획은 중공군의 졸병도 알았고 피난민들도 알았다. 미군은 피난민들의 승선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흥남항으로 몰렸다. 북청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중략)… 미군이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다는 소문은 발표도 없이 퍼져 나갔다. 수송선들이 모래 위로 선수를 들이밀고 철문을 열었다. … 손을 잡아라. 허리띠를 붙들어 …(중략)… 마지막 폭격기들이 항모로 돌아왔다. 항구 안에 남아 있던 구축함이 16인치 포로 흥남부두를 부수고 접안 시설을 부수었다. 함포가 부두를 부술 때 민간인들도 부두에 모여 있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서 부두도 산맥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기 속으로 포탄은 계속 날아갔다."

당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란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다.

피란민들이 배의 외벽을 따라 내려온 줄을 타고 경쟁하듯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은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담겨 배에 끌어올려졌다고 했다. 피란민들이 어망에 실려 올려졌다는 얘기는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각종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증언이다.

"나는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탄 것 같아. 25~30명 정도가 어망에 타서 어떤 사람은 거꾸로, 어떤 사람은 가로로 처박혀서 어망에 실렸던 것 같아. 아니 그렇게 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다음 날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정박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하선 허가를 받지 못했고, 성탄절인 12월 25일 거제도의 작은 포구 장승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뒤 장승포항 주변의 국민학교에서 잠시 추위를 피했다. 이때 머문 학교의 이름은 '장승포초등학교'로 1921년 개교한 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교사(校史)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650명이다.

이 학교 정원욱 교무부장은 지난 10월 31일 전화통화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왔을 당시 장승포항 주변에 국민학교는 장승포초등학교가 유일했다"며 "피란민들이 우리 학교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낸 김찬수 씨가 쓴 '내가 겪은 6.25'를 보면 당시 거제도에는 수만 명이 몰리면서 대규모 피란민 촌이 만들어졌다.

"밤에 보니 주변 언덕과 높은 곳에 불빛이 휘황찬란하여, 개발하기 얼마 전의 서울 돈암동 산꼭대기의 판자촌 야경같이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불을 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이후 어망창고에서 열흘 정도 있다가 연초면에 있는 학교에서 방위군 신청을 받아 자원입대를 했다. 전문학교(북청농업전문학교 잠업과)까지 나온 할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자 감찰부에서 조서를 받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방위군이 해산된 뒤에는 '창설 멤버'로 제주도 육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제주도 모술포에 훈련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직접 돌을 메다 날라서 훈련소 벽을 쌓고 사실상 우리가 만들었지. 당시 훈련소장이 백인엽 장군이었어. 변변한 총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 총 대신에 대나무 죽창을 들고 훈련을 받았으니까.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아."

할아버지의 증언은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 나와 있는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대한 설명과 일치했다.

서귀포문화대전은 육군 제1훈련소에 대해 "당시 백인엽 준장을 소장으로 1951년 3월 21일 창설되어 1956년 1월 해체되기까지 5년간 50만여명의 신병을 배출해 냈다. 신병들은 대체로 1개월 정도 훈련받고 전장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훈련소를 거쳐 부산에 있는 보충대대에서 통신학교로 배치를 받았고, 훈련을 거쳐 대구 육군본부에 있는 통신감실로 발령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사행정과 소속으로 일종의 행정병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때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가 된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무선통신사였는데, 이때도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다.

부대 안에서 열린 웅변대회나 연극대회 무대에 송해가 올라 농담을 시작하면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송해가 했던 대표적 농담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자를 꺼내서 빨랫줄을 만든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 듣기에는 농담치고는 다소 '살벌'한데, 이때는 배꼽을 잡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오민석 교수가 쓴 '송해 평전'에도 송해가 통신학교 무선부를 거쳐 대구 육군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고 돼 있다. 송해는 군 생활 중 3군 종합 콩쿠르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

군예대(軍藝隊)가 자신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올 때마다 송해가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임시 휴가증을 끊어 군예대의 위문 공연장에도 자주 불려 나갔다고 한다.

전진성 할아버지의 기억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오민석 교수는 송해가 제대 후 함께 군 생활을 한 장세균이라는 사람을 따라 '부천 싸전거리'에 와서 두부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전진성 할아버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세균이라는 사람이 현재 인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우체국 송신소에 있었고, 송해도 이곳에서 함께 일하다가 유랑극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든 간에 송해는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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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경남 거제도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를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할아버지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강원도 원주에 있던 1통신단으로 전입됐다가 1954년 5월 제대를 한 뒤 부평으로 왔다.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만나던 아내가 부평에 있는 연합병원(현재 세림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부평에서 1955년 7월 결혼을 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세림병원은 1940년 부평역 앞에서 부평의원으로 문을 열었고, 1963년 5월에 병원이 증축되면서 부평연합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현재 세림병원 부지(청천동 302)에 새로 건물을 지어 병원을 이전했다. 할아버지도 연합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부평에서 살고 있다.

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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