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35]대한유화-4 발전과 후퇴

시멘트·선박 확장중 '은행관리' 위기

경인일보

발행일 2017-11-21 제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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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양회 문경공장
1960년대 승승장구하던 대한양회는 매각설이 나온 후 결국 1971년 원풍산업으로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후 쌍용양회에 재매각돼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된다. /경상북도 제공

크링커·레미콘 공장 잇단 완공
PVC·선박회사 설립 승승장구
사채 부담 대한양회 매각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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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개풍그룹은 서울은행 경영권까지 포기해야 했다.

5·16쿠데타 이후 정부가 은행의 대주주 사금고화 및 전횡을 방지하고자 부정축재 환수 처리의 일환으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하는 일반은행의 주식을 전부 환수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정부와 재벌간의 정경유착의 공식적인 고리가 형성됐다. 또한 재벌기업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대변해줄 단체결성의 돌파구도 마련됐다.

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이정림이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탄생 배경이다.

이정림은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8월 3·1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삼성의 이병철과 함께 전경련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공로자가 바로 이정림이었다.

한편, 대한양회는 1963년 7월 시멘트 대량소비지인 서울을 겨냥해 용산구 서빙고동 한강변에 연간 생산량 20만t 규모의 크링커 처리시설을 완공했다. 시멘트 완제품의 저장기한은 6개월인 반면에 90% 정도 완성된 자갈형 고체 시멘트인 크링커는 무기한 저장이 가능해 비수요기에 장기간 저장해 두었다가 성수기에 매각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대한양회는 이후 레미콘 공장까지 세우고 레미콘 운반트럭으로 서울 일원에 생(生)콘크리트를 공급함으로써 또다시 히트를 쳤다.

1967년에는 대한양회의 생산실적은 36만6천t으로 국내 시멘트생산량의 15%를 차지했는데, 그해에 생산시설 10만t을 늘려 연간 생산량을 48만t으로 확대하고 서울 서빙고의 크링커 분쇄공장도 시설을 배가했다.

1965년에는 국내 최초의 PVC 공장인 공영화학공업(주)를 설립했으나 상당기간 동안 수익은 별로였다.

1967년에는 국내 최대의 무역업체인 천우사의 전택보(全澤珤)와 대농그룹 창업자 박용학(朴龍學) 등과 공동 출자해서 자본금 1억5천만원의 대한선박(주)를 설립하고 해외차관자금으로 선박 등을 도입했다. 대한양회는 대한선박의 지분 3분의 1을 확보하고 국내 최대의 선박왕 꿈을 키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8년 상반기에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으로부터 7억원을 융자받으면서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상술로 시멘트업계에서 독주하던 대한양회가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는 데 대해 말들이 많았다.

폭리로 비난을 사던 시멘트업체들이 사채를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느 회사든 타인자본의 절반은 사채로 충당한다는 것인데 잘 나가던 대한양회가 은행관리를 받은 때문에 말들이 더 많았다.

특히 대한양회는 개풍그룹의 중심기업이자 이정림이 특히 아끼는 터여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항간에 대한양회는 생산규모가 업계 최소일 뿐 아니라 기계시설도 낡았으며 석회석도 좋은 것은 이미 다 파먹어 이참에 빚이나 잔뜩 내서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절대로 손해 보는 사업은 붙잡고 있지 않는다며 대한양회 매각설을 부채질 했다.

대한양회는 1971년 8월 12일 원풍산업(이상순)으로 매각되면서 그간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원풍산업이 대한양회 자산 34억4천만원에서 은행부채 등 28억4천만원(외화 170만 달러 포함)을 차감한 6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이상순은 원풍산업 외에 천일곡산과 평화유지 대표이며 대한농산의 대주주로 이북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러나 대한양회는 1975년 1월에 쌍용양회에 재매각되어 쌍용양회 문경공장으로 재발족됐다.

대한양회의 연간 생산능력은 약 50만t이나 양회제조방식이 구식인 습식공정으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생산비 급증을 못 견딘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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