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37]대한그룹-1 사업과의 인연

'특유의 이재능력' 단기간 거부 반열

경인일보

발행일 2017-12-05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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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대한전선
1950년대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는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설경동이다. 사진은 1955년 대한전선 출범을 알리는 설경동. /대한전선 홈페이지

적수공권서 함경도 굴지 미곡상
동양수산 정어리사업으로 성장
수원 성냥공장 남한 일대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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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0년대에 재벌 서열 4위에 올랐던 대한그룹의 창업자 설경동(薛卿東·1901~1972)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설흥업과 어머니 조성녀 사이에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설경동은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일본의 오쿠라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학비조달의 어려움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설경동은 귀국 후 부령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어머니와 신의주에서 쌀장사를 시작해 10여년 만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굴지의 미곡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워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후 설경동은 청진을 사업 근거지를 삼고 만주와 중국 등을 돌며 곡물류와 수산물 등을 수출했다.

어느 정도 사업자금을 확보한 후 설경동은 1936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어선 3척의 동양수산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일제는 부족한 유류(油類)를 대체하고자 동해안에서 엄청나게 잡히는 정어리의 지방(脂肪)을 추출해서 등유(燈油)로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동해안에는 정어리 잡이가 성행했던 것이다.

당시 동해안의 정어리시장 규모는 1천만원(현재가치 1조원)에 달했다. 동양수산은 정어리 잡이 및 가공사업으로 번성해서 해방 무렵에는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어군(魚群)을 탐지 할 정도의 대선단으로 성장했다.

1945년 8·15해방 직후 북한에 공산당정부가 수립되면서 설경동은 친일파로 몰려 동양수산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제하에서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시작해 약관의 나이에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는 대(大) 미곡상으로 성장했으나, 지주와 자본가 등을 용인하지 않는 북한에서의 사업을 계속하기가 더 이상 곤란했다. 더구나 친일파 실업인으로 몰리는 터여서 설경동은 재산을 처분하고 어선 여러 척을 끌고 월남하였다.

월남 후 그는 어선과 부동산 등을 처분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해산물 수출 회사인 '대한산업(大韓産業)'을 설립했다. 해방 전 그는 이미 중국과 만주 등을 돌며 무역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손쉽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적산가옥 및 토지 등을 헐값에 확보했다가 시세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사업을 하는 원동흥업을 설립해서 부(富)를 축적했다.

"해방이 되자 세상은 나라를 되찾은 기쁨과 식민지체제가 무너지는 대혼란이 왔다. 특히 일본인이 버리고 간 재산은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였다. 이른바 적산(敵産)으로 불리던 토지는 말뚝만 박으면 임자요 집은 문패만 바꿔 달면 주인이었다." (이종재, '재벌이력서', 36면)

약간의 여유자금에다 이재(理財)에 어느 정도 감만 있으면 '적산 비즈니스'는 단기간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대박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설경동은 경기도 수원에 성냥공장을 설립해 남한 일대를 석권하는 성냥공장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성냥공장도 적산기업으로 추정된다.

적수공권으로 월남했던 설경동은 특유의 이재 능력을 발휘해서 단기간에 남한에서도 손꼽히는 거부(巨富) 반열에 올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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