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빛과 그림자

장영미

발행일 2017-12-15 제1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장영미 동두천시의회 의장
장영미 동두천시의회 의장
50년 전, 학교 운동장. 신나게 뛰어놀다 문득 바라보니, 시소 밑에 자리했던 그림자는 어느덧 미끄럼틀 아래로 슬며시 도망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하늘, 저만치 높았던 해도 어느새 서산으로 저물고 있었다. 늘 똑같던 하늘과 땅의 당연한 풍경일 뿐인데 그날따라 해와 그림자는 내 눈앞에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문득, '아, 저녁때가 되었네!' 석양을 등지고 집을 향해 내닫는 9살 꼬마의 발끝에서는 나를 똑 닮은 그림자 하나가 껌딱지처럼 붙어 반 발짝 앞서 달리고 있었다.

늘 나를 둘러싸며 항상 '움직이는' 그 둘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의식했던 그 어느 겨울날, 꼬마는 깨달았다. 빛도 그림자도 한 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그리고 15년 후, 직장시절.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수입의 많은 부분을 기부하며 틈날 때마다 봉사활동에 열심인 한 친구가 있었다. 좋은 일이지만 좀 적당히 하라고 가벼운 핀잔을 던졌을 때, 그는 쿨하다 못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불행은 언제든 나한테도 있을 수 있잖아. 그냥 보험 드는 거야. 보험." 보험이라. 아직 4대 보험의 개념도 없던 그 당시에, 그 친구는 자발적 사회안전망 구축을 설파한 선각자였을까?

나름 고결하고 숭고해야 할 기부와 봉사를 너무나 일상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보험에 빗댄 것에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다.

언제부터인가, 뉴스를 통해 안타까운 사고와 불행한 이들의 소식을 접할 때면, 바로 그 때 그 자리에 내가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숙연해지면서 그 옛날 그 친구의 말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그 모든 사고와 불행이 '내게도 있을 수 있는 일'임을 각성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당했을 일인데 단지 확률과 운의 작용으로 나를 비켜간 불행임을 그렇게 자각하게 되면서,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절대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개인의 행복은 사회에서 진 빚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에서 앙리에트가 한 말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고, 빛은 그림자에게 빚을 지며 비로소 존재한다. 등 뒤 땅 위의 풀꽃을 제 그림자로 덮으며, 사람은 따스한 햇살을 온 몸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양지와 음지는 시소처럼 서로 자리를 바꾸고 우리네 삶은 언제 갑자기 내리막 미끄럼틀을 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웃의 고통은 나와 상관없는 것일 수 없다. 힘든 일을 서로 거드는 '품앗이'처럼 봉사와 기부는 서로의 그림자를 거두어 나누는 '그림자(품)앗이' 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로 가정하더라도 나눔은 일종의 필수보험이 된다.

봉사와 기부, 나눔은 역지사지의 당연한 결론이며 인지상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음지에 대한 양지의 의무이며 그림자에게 진 '빛의 빚'이다. 빛은 나누며 퍼뜨릴수록 더 커진다.

세상의 그림자들을 향해 뿌려지는 빛이 많아질수록, 빛 자신 또한 혹시나 당할 운명의 시소질에 미끄럼틀을 타게 되더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빛도, 영원한 그림자도 없다. 그리고 빛과 그림자, 둘은 결국 하나다.

/장영미 동두천시의회 의장

장영미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