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38]대한그룹-2 재벌로 성장

적산불하·공업화 복합기업 재계 4위로

경인일보

발행일 2017-12-12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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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방직 수원공장
1960년대 대한방직 수원공장 전경. /'방직협회 20년지' 수록

해방·한국전 딛고 대한방직 설립
유통→제조업 주력 전환 디딤돌
1950년대말 전선·제당·증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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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동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 재산을 잃었으나, 전쟁 전에 소림광업(小林鑛業)으로부터 결제자금 대신 억지로 떠맡았던 대량의 중석을 기반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소림광업은 1934년 일본인이 설립해 1940년 무렵에서는 강원도 홍천광산, 경기도 가평의 대금산광산, 함남 영원의 낭림광산, 경북 달성광산, 평남의 성천광산과 양덕광산 등을 거느린 자본금 2천500만원의 국내 최대 광산업체 중 하나였다.

6·25전쟁으로 중석 수요는 급증했으나 생산이 부진해 중석 가격은 전쟁 전의 톤당 400달러에서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4천 달러로 거래됐던 것이다. 더구나 전쟁 중 환율 또한 극히 불안해서 수출업자들은 엄청난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중석을 처분해서 만든 거금으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설경동은 중석을 매각해서 확보한 자금으로 1953년에 원조불 35만 달러를 대부받아 자본금 1억환의 대한방직을 설립하고 1954년부터 수원 세류동 36번지에서 방기 1만추로 조업을 개시했다.

1955년 8월에는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직기 300대를 배정받는 한편 대구 칠성동 20번지 군시공업(群是工業) 대구공장(조선방직 대구공장)을 7억 환에 불하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또다시 운크라로부터 55만 달러를 배정받아 혼타면기(混打綿機)를 확충하는 한편 동아방직으로부터 방기 1만1천800추를 인수했다.

그 결과 대한산업은 1957년 현재 수원공장(방기 1만추), 대구공장(방기 3만2천576추, 직기 516대)의 대규모 섬유기업으로 부상했다. 기업경영 반세기만에 사업의 주력을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설경동은 이로써 국내 정상의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섬유산업은 정부가 최우선으로 육성하는 정책산업으로 장기저리의 정책자금 알선 및 세제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산업으로 이 분야에서 발군의 성과를 낸 기업들이 최대 재벌로 급부상했다. 태창, 삼호, 삼성그룹 등이 상징적인 사례였다.

설경동은 1955년 2월에는 적산기업인 조선전선(朝鮮電線) 시흥공장을 인수해서 자본금 300만 환의 대한전선을 설립하고 1957년부터 플라스틱 전력케이블을 생산했다.

대한전선은 해방 후에 최초로 설립된 종합전선업체였다. 한국의 전자통신 산업의 효시는 1885년 서울-인천 사이에 가설된 유선전화였다. 일제 통치기 이후부터는 산업근대화 추세에 따라 통신은 물론 전력선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면서 전선에 대한 수요가 점증했다.

1956년에는 대동(大東)제당(대한제당의 전신)을 설립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경동은 설탕사업에 눈을 돌렸다.

1940년대 덴마크,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00파운드를 넘어섰지만 50년대 중반 국내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97파운드에 불과했다. 설경동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신규 사업에 진출했다.

설경동은 같은해 대동증권(大同證券)을 인수함으로써 1950년대 말에는 모기업인 대한산업 외에 대한전선, 원동흥업, 대한방직, 대한제당, 대동증권 등을 거느린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해 재계 서열 4위로 부상했다.

이 무렵에 재벌화했던 여타 기업가들처럼 적산기업 불하와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편승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 외부환경의 변화로 두 번의 좌절을 경험했던 설경동이 사업기반이 전혀 없었던 남한에서 짧은 기간에 정상의 재벌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사업경험과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감각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해방 이후 제공된 귀속기업의 불하 내지는 막대한 원조물자의 사업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정치권에 유착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지근(至近)거리에 있어야만 했는데 그가 한창 재벌화를 도모하던 1954년부터 집권당인 자유당의 돈줄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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